◎서원에 대하여◎

                                                       00학번 김영주

 

 

  개요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때 서적 편수처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에서 유래하였고 한국에서 서원(書院)이란 흔히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말 조선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선비들의 학문 정진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후에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견제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으로 고려말의 학자였던 안 향을 배향하고 학규는 중국의 주희가 세운 백녹동서원의 것을 본받았다. 그후 1550년(명종 5) 이 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초기의 서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액은 편액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 관리를 위한 토지와 노비, 다량의 서적이 부수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하에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 설립의 직접적 계기는, 사림의 정계 재진출에 따라 정책으로 제시되었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체제의 혁신에 있었다.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던 신진사류들은 도학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며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문묘종사운동이었다. 이는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미 명종 때까지 거의 2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는 50여 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의 서원이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지방 사림들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는데 본읍이나 인근 지방관이 서원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원의 인적 구성은 원임(院任)과 원생(院生)으로 나누어진다. 원임은 원생의 교육과 서원의 제반 대소사를 관장하는 책임자인 원장(院長)을 비롯하여 서원의 향사(享祀)·교육·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들로 구성되었다. 원생은 양반 자제들 가운데서 유교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생원·진사·초시입격자·유학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원생들에 대한 교육과정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성리학의 교육과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었다. 교육내용은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제시한 교재의 범위와 학습 순서가 모범이 되었다. 사서오경을 본원(本原)으로 삼고 《소학》 《가례(家禮)》를 예법의 문호(門戶)로 삼았다. 교수 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문답하는 강(講)이 있었다.

  서원의 경제기반은 토지와 노비를 바탕으로 했는데, 본래 각지의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학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보장책은 없었다. 단지 국가가 승인하는 형식인 사액의 경우 면세전 3결(結)과 노비의 혜택이 따랐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 당초부터 그 지방의 사림으로부터 토지나 노비가 기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원이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자 면세를 목적으로 납입되는 토지, 면역을 목적으로 투탁하는 양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 향촌자치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후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은 숙종대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각지에 서원이 남설(濫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전국적 확산의 주된 요인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붕당은 정쟁(政爭)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당파형성에 학연(學緣)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은 그 조직과 확장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설되는 서원은 봉사 대상 인물의 선정이 원칙에서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시기에 강화되어가던 가문의식이 서원의 남설을 초래하기도 했다. 후손이나 문중에 의해 설립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러한 서원은 교육기구로서의 1차적 기능이 흐려지고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진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166곳(사액 105곳)이나 건립되는 급격한 증가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에 대해! 서는 1714년(숙종 40)에 첩설(疊設)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의 제재조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금령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727년(영조 3)부터였다. 이때 처음으로 금령을 어기고 첩설된 것들에 대한 철회조치가 단행되었다. 그후 영조·정조 때를 통해 서원의 남설에 대한 억제정책이 계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에 따라 신설 사액되는 것도 있었다.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정권의 기반이 사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설 사액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그 문란은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설이 문제되던 이 시기는 서원명칭으로의 건립이 금지되어 있어서, 대신 사우(祠宇)의 건립이 성행하였다. 서원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질적 저하를 가져왔고, 건립·유지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갹출하는 구청(求請)·양정(良丁)을 불법적으로 모점(冒占), 피역시킴으로써 양정부족현상을 야기하는 등 사회적 폐단을 유발시켰다. 그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다. 그는 당시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서원들은 대한제국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도 있으나 대부! 분이 47개소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원기능의 핵인 사당과 강당은 서원건축의 시작이다. 이는 서원의 설립이 선현을 봉사하고 아울러 유학강론에 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사당과 현세적인 강당은 사원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서원에서 건립되었다.

서원건축의 기본적인 배치구도는 서원이 입지한 지형이나 건립시기, 기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전면에 강학구역을 두고 후면에 제향구역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일관된다.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이라는 기능에 의해 공간구성·배치수법이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다. 즉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러한 중심건물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이를 보관하는 서고, 서원의 관리 및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교직사(校直舍), 제사에 필요한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 택지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따라 적당한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의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가 많다.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內三門)을 만들어 통행하도록 했다. 교직사는 강당 서쪽에 따로 담을 쌓아 배치하고, 제기고는 사당 앞 옆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당의 구조는 익공식(翼工式)의 단층팔작집이 일반적이며 동재와 서재는 민도리집 형식인 단층맞배집, 사당은 익공식 단층맞배집으로 건축되어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최대? ?간소한 양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담장을 높지 않게 세우고 그 일부를 터서 내부에서 밖의 자연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조경식물도 적절히 심어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

  현재 서원은 향교와 함께 아직도 제사나 지방유림들의 시회(詩會)·강회(講會)가 열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지만, 강학과 교육이라는 본래적 기능은 거의 없다.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사적 제55호),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의 옥산서원(사적 제54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보물 제350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의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의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등이 있다.

 

  서원의 교육

  서원의 기능은 강학(講學)과 사현(祠賢), 제향(祭享)의 두 가지 기능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설립 당시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당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에 대신하여 양반들의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특히 서원은 사설이였기 때문에 관학인 향교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는 다르게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出世主義)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인격고시(人格考試)를 시켰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교육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성리학이 중심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한편 과거를 위한 공부도 본업은 아니었지만 중시하였다. 그러나 유학의 원리에 어긋나는 이른바 이단(異端)에 관계되는 서책은 철저히 금지하였다.

  교육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義理)를 문답하는 강(講)이라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을 택하였으며 평가는 4내지 5단계로 하였다. 유생들의 입원자격은 소수서원의 경우 생원, 진사를 우선으로 하였으나 향학열이 있는 자를 허락하였다.

  정해진 인원수는 없었지만 서원의 경제력과 관련하여 상주 유생수는 규제하였다. 그러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로서 사묘(祠廟)에 다시 모신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경우 30명까지 허락하였다. 예를 들어 소수서원은 10명 내지 30명의 범위 내에서 유생을 뽑았다.

 

  서원의 사회적 기능

  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 장수처(藏修處)로서 성립되었지만 16세기 이후 사림이 정치,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그들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 잡았으며 향학시행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여 지방민의 교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서원은 명분과 의리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좌우되었던 붕당정치(朋黨政治) 하에서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더욱 증대하게 됨으로써 유림들의 여론인 사론(士論), 공론(公論) 조성의 집약소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서원은 동성부락(同姓部落)의 발달과 함께 동족집단 내부의 상호 결속과 사회적 지위 유지의 필요성에 따라 그 중심 기구로서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서원은 문중네 현조(顯祖)의 제향을 통한 향중(鄕中)에서 벌족(閥族)으로서의 사회적 지위 유지, 문중자체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내의 윤리질서 유지 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은 당쟁 및 문중의 시비에 휘말리고 또한 대민작폐(對民作弊)의 온상으로 변모되어 사회문제화되자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서원의 도서관 기능

  서원은 그 설립의 일차적인 목적이 교육과 학문연구에 있었으므로 교육문고로서 도서의 수집·보존의 역할도 함으로써 사립교육기관의 도서관 구실을 하였다.

서원이 도서관 역할을 하였음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서 입증되고 있다. 주세붕은 이 서원을 세우면서 캐낸 구리그릇 300여근을 팔아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의 성리학 도서를 구입하였다. 그 뒤 사액서원으로 발전하면서 국가로부터 때때로 많은 서적을 하사 받았으며, 서원에서도 자비로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고, 또한 각 서원과 문중에서 간행된 서적을 보내옴으로써 소수서원은 1600년경에 107종 1678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지방의 도서관 역할뿐만 아니라 서적을 직접출판하기도 하여 지방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 문화창달과 지식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는 출판을 전담하는 간소(刊所)가 있었으며, 간행된 책은 주로 교육용과 서원의 배향된 인물의 문집과 유고(遺稿) 등이었다.

  간행된 서책은 다른 서원 및 각 문중과 홍문관·규장각 등에 배부되었다. 정조 20년(1796)에 편찬된 서유구의 "누판고"에 의하면 이때까지 78개 서원에서 167종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서원의 제향의식

  서원의 양대 기능 가운데 하나가 제향(祭享) 기능이다. 특히, 후기에 오면 교육기능이 약화되면서 제향 기능은 더욱 증대되었다. 향례(享禮)에는 매달 삭망(朔望)에 알묘(謁廟)하는 향알(香謁)과 정월초에 행하는 정알(正謁) 또는 세알(歲謁) 및 3,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행하는 춘추 향사가 있다.

  춘추향사는 원장, 유사가 3일전에 입제(入祭)하면서 시작되는데, 행사주관은 선출된 헌관(獻官), 집사(執事)가 담당하였으며, 그 절차는 문묘향사에 버금가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다. 특히 이 때 서원 정문 출입은 복인(服人)이나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향사에는 지방관(地方官)을 포함하여 원근(遠近)에서 선비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향사의식은 유교적 질서를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유교보급과 정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와는 달리 중국의 성인을 배제하고 우리 나라에서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분을 서원의 주향(主享)인물로 기린 것은 신제(愼齊) 주세붕(周世鵬)이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높인 이래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리학적 고급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주로 설립되었던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사학으로서, 물론 서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서원의 설립자는 대 유학자나 그를 흠모하는 후학이 설립과 운영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서원이 성리학 연구를 전제로 한 도학서원의 성격으로 설립과 운영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원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기능도 본래의 추구했던 교육기능보다는 선현의 향사 중심으로 성격이 변모하여 '시우'와도 구분이 안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 서원이 갖는 역사적 의미나 서회적 의미는 서원의 개설을 계기로 향촌에서 학문을 닦는 풍토가 무르익게 되었고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인사가 대부분 당대 명성을 떨치었던 거물들이었기에 해당지역민들의 정신적인 귀감이 되어 효제 충신의 정도를 깨우치게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