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20010227 이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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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

문화재: 국보 18호, 국보 19호, 국보 45호, 국보 46호, 국보 17호 등

 우리나라 5대 명찰 중 하나인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676년   (신라 문무왕16)에 왕명에 따라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며, 마소가 근접할 수 없는 곳을 찾아 5년여를 헤맨 끝에 이 곳 봉황산 중턱에 화엄경의 근본도량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대사의 정성을 모르는 범인의 눈에도 부석사와 그 주변경관은 예사롭지 않다.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16)에 왕명을 받아 지은 부석사는 고려초 소실되었고, 그 유명한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목조 건물이다. 부석사는 입구의 천왕문에서 안양문에 이르기까지 108개의 석계단을 밟아 오르는데 이는 108번뇌(煩惱)를 제도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부석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석등,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등 5점의 국보가 있고,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3층석탑, 당간지주, 고려각판  등 4점의 보물이 있다.  이외에도 2점의 지방유형문화재가 있다.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  물들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부석사를 대표하는 것은 대웅전 격인 무량수전과 은행나무길 그리고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경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큰 은행나무길이 많이 있지만, 부석사 은행 나무길처럼 운치 있는 길은 찾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길의 폭이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는 넓이이고, 적당히 경사진 흙길 그리고 뒤에 무량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 등이 어우러져, 가을이면 이 길이 마치 극락의 진입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부석사를 누가 건설했는지는 모른다.(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가르키는게 아닙니다)그러나 그가  이 건물을 역사할 때 보면 고귀한 사람이나 미천한 사람이나 이 부석사의 대웅전인 무량수전에까지 오르려면 한 길만을 따라 가야 하게 만들었다. 오로지 이 길밖에 없게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그것도 건물 주위가 아닌 밑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은 아마도 만인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1)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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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한 국내의 대표적인 불전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집으로써 기둥머리 34㎝, 중간  배흘림 부분 49㎝, 기둥밑 44㎝의 배흘림으로 되어있어 부드럽고 탄력적인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무량수전 안에는 소조여래좌상이 서쪽에 안치되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량수전은 1016년(고려 현종7)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왕명으로 중건할 때 지은 사찰이다. 창건연대가 확인된 목조건물 중 무량수전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집이다. 기둥은 각각의 지름이 기둥머리 34㎝, 중간 배흘림 부분 49㎝, 기둥 밑 44㎝의 배흘림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부드럽고 탄력적인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무량수전 안에는 소조여래좌상이 서쪽에 안치되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불전의 내부는 건물의 크기에 비해 탁 트여 있어 막힘이 없고 시원하다.   부석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무량수전은 건축가라면 누구나 한번은 와 봄직한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한 국내의 대표적인 불전이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건평은 65평이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위에 알맞은 배흘림 기둥을 세워,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린 주심포(柱心包)계이며, 팔작지붕은 몸체와 옥개(屋蓋)의 비례가 조화있게 처리되어, 규모에 비해 안정감이 있다.  그리고 무량수전이란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에 원융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왕2년 재건설은 아직 의문에 있다. 이유는 건물의 세부기법이 그때에 해당되는 양식으로는  보기어려우며, 특히 같은 경내의 조사당이 우왕3년, 즉 무량수전보다 1년 뒤의 건립이라고 되어있으나 두 건물 사이의 비교에서도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2)무량수전 앞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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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은 부석사 창건 당시의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화려한 조각 솜씨와 조형미로 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손꼽힌다. 땅을 다진 지석 위에 네모난 기단석을 깔고, 그 위에 연꽃잎 모양의 복석을 얹었다. 그리고 8각 석주를 세우고 앙연석을 받친 후에 8각의 화사석을 올렸다. 화사석의 4면에는 창을 뚫고 나머지 4면에는 보살상을 새겼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화사석 위에 8각 옥개석을 씌웠다. 옥개석을 덮고 있는 푸른 이끼는 오랜 세월을 이겨온 석등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방형(方形) 기대석(基臺石)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배치되고, 기대석 위의 팔각 하대석(下臺石)에는 복련(覆蓮)과 귀꽃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8각의 간주석(竿柱石)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 위의 상대석(上臺石)에는 부드러운 8엽(八葉)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8각의 화사석(火舍石) 벽면(壁面)에는 네 곳에 화창(火窓)이 있고 네 곳에 세련된 보살상(菩薩像)이 조각되었다. 옥개석(屋蓋石)위에는 보주(寶珠)가 있었는데 보주대(寶珠臺)만 남아 있다.

 

 

 

3) 조사당

 

img13.gif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의 초상을 안치한 조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주며, 우리나라 주심포계의 과도기적 건물로 양식과 기법에서 특이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이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 등 고려 말기에 있어, 그리고 당대의 건물에 남아 있는 매우 희귀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건물은 석재(石材)를 난적(亂積)한 낮은 기단(基壇) 위에 서있으며, 중앙에 석계(石階)를 두었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물에 비하면 기둥에 나타난 배흘림이 약화되었고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두공을 받치고 있다. 주두(柱頭)와 소루(小累)에는 굽받침이 없고 외목도리(外目道里) 밑의 장설(長舌)도 단장설(短長舌)이 아닌 통장설로 되어 있어 조선 전기의 주심포계 건물과 같은 점이 많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1377년(고려 우왕 3)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건물 내부의 입구 좌우에는 보살상˙사천왕상(四天王像) 등 고려말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현재는 무량수전(無量壽殿)안에 지정문화재로서 보관되어 있다.

4) 조사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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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벽화로 고려 회화사의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나, 일제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  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 하다. 고려시대의 회화는 보존된 유적이 매우 희귀해서 그 양상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힘든다. 부석사의 조사당벽화6면은 이 건물 내진(內陳) 벽면에 그렸던 건축당초의 작품으로서 확인되어 현재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 에 부석사무량수전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건물창건연대는 이 건물을 중수할 때 발견한 묵서명문(墨書銘文)에 따라서 서기 1377년으로 밝혀졌으므로 이 벽화의 제작연대도 이로써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국내에 유존된 고려시대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를 비롯해서 예산 수덕사 웅전벽화(禮山修德寺大雄殿壁畵), 개성수락암동고분벽화(開城水落巖洞古墳壁畵), 장단법당방고분벽화(長湍法堂坊古墳壁畵), 개풍군공민왕릉벽화(開풍郡恭愍王陵壁畵)등의 유례가 있으나 회화적인 격조로 보나 그 보존상태로 보나 유존이 고려시대의 벽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 조사당벽화이다. 이 조사당벽화는 천왕상(天王像) 각1면과 보살상 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그 내용을 조사 당내진(祖師堂內陣) 원위치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佛名未詳)>

  (2)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3) 황목천왕상(黃目天王像)

  (4)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5) 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佛名未詳)>

 이들 벽화는 토벽위에 후레스코로 그린 것이며 배경을 심록색계(深綠色系)로써 메꾼뒤 홍(紅)자(紫)녹(綠)백(白)다(茶)금채(金彩)등으로 상용(像容)을 농채(濃彩)한 것이다.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의 상용(像容)은 특히 힘찬 운동감을 나타낸 동적인 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에 설채(設彩)를 해서 전반적인 인상은 매우 힘있는 율동감이 넘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보살상(兩菩薩像)은 보살상이 지니는 정일감(靜溢感)을 잘 살려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을 잘 구사해서 고려조 예술이 지니는 아름다운 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건축이 황폐되었을 당시 우루(雨漏)로 오염된 부분이 남아 있고 또 후세의 묵서(墨書) 낙서 등도 화면을 더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 그 채색이 발견 당시보다 약간 퇴색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우려된다.

5) 소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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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조여래좌상은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에 모셔질 만한 걸작이다. 특이한 점은 무량수전이 남향인데 아미타불은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호국의 기원으로 서라벌을 향한 것이라는 설이 재미있다. 이 불상은 신라시대 불상의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을 감출 수 없어, 시대적인 양식의 차를 보여 주고 있다. 온몸에 금빛이 찬연하고, 고려불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특히 소상(塑像)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작품이다. 신라시대의 조상(造像)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 고려 각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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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의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이 각판은 부석사에 있는 정원본(貞元本)40권, 진본(晋本)60권, 주본(周本)80권 등 3종의 한역본(漢譯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고려시대 목판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이란 크고 방정(方正)하고 넓은 뜻을 가진 법계를 증득(證得)하신 부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경전(經典)이라는 것이다. 이 화엄경판은 우리나라에 유래가 없는 한 줄에 34자씩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 희종(熙宗) 아들인 충명국사(沖明國師)때(13세기)나 원응국사(圓應國師)때(14세기)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사상은 고대(古代) 한국문화(韓國文化)를 꽃 피우기 위한 기본 이념으로 제시되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7)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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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옆 석간수에 목을 축이고 오르막을 올라 조사당을 옆으로 두고 오솔길을 따라가면 스님의 목탁 소리가 맑게 들리어 온다. 여기가 자인당이다. 이 불상은 본디 부석사 동쪽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자인당으로 옮겨온 것이다. 두 손은 없어지고, 얼굴과 대좌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나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형태이다. 이 두 불상은 세부조각만 약간 다를 뿐, 전체적인 모습과 조각양식이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으며, 부분적인 묘사에서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또, 가슴쪽으로 올라간 두 팔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불상양식으로 경직된 신체, 형식적으로 묘사된 옷주름,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8)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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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 한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 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9) 안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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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 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 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10) 부석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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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http://www.knto.or.kr - 부석사

 http://www.iyeongju.pe.kr/ - 아름다운 영주

 http://my.netian.com/~angela5/ - 대한민국 국보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