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의발달과 변천과정

                   

                    

                                            ·학    번: 20010314

                                            ·이    름: 김   민

 

[목   차]

序論

本論

1. 우리나라 인쇄의 기원

2. 통일신라시대의 인쇄

3. 고려시대의 인쇄

4. 조선시대의 인쇄

結論

 

 

 序論

  인쇄는 인쇄판의 판 면에 먹 또는 잉크를 묻혀 그 판 면의 문자·기호·그림 등을 종이·비단 등에 누르거나 문질러 찍어내는 일, 또는 그 기술을 말한다. 인쇄판은 옛적의 목판·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평판·볼록판·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나라의 초기 인쇄는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목판권자본이 751년 (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의 목판인 쇄는 본문 내용이 짤막한《다라니경》등의 불경을 소형판에 새겨 다량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목판인쇄는 꾸준히 발달했으며 그 유물로 1007년에 인쇄된《보협인다라니경 寶 印陀羅尼經》등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목판인쇄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만 아니라 오직 한 책의 출판으로 국한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출판공정 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활자인쇄가 시도되었다. 그 최초의 것은 11세기 중기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고안한 교니활자(膠泥活字)의 인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료가 흙이고 조판이 어려워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 실패를 금속활자의 인쇄에서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인쇄이 다. 13세기 전기에 주자로《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 주자본을 다시 새겨낸《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頌證道歌》가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면에서 볼 때 동·연·철·나무·찰흙 등과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의 면에서 볼 때는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론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인쇄술을 주로 다루어 설명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의 기원과 신라시대의 인쇄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本論

1. 우리 나라 인쇄의 기원

 (1) 사경(寫經)의 활용

 우리 나라에서 인쇄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3∼4세기  경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교류가 점차 빈번해지면서 각종 서사 재료에 기록하는 방식과 서책들이 전해져 오고, 이러한 것들이 점차 발전하여 인쇄술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널리 보급되었던 기록 방식으로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필사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필사 방식은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불교 경전을 베껴 쓴 사경(寫經)으로 구체화되어 널리 활용되었으며, 그 유물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불교 초기에 있어서는 사경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는 승려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불경을 서사(書寫)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납탑(納塔) 공양하면 모두가 부처와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며, 부처의 보호와 위력으로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수복(壽福)함은 물론 소원 성취 할 수 있다는 불설(佛說)에서 근거한 것이다. 사경을 납탑하는 행사에는 여러 불경이 사용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다라니경이 주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경을 납탑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사경 공덕은 정성껏 서사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 불교가 전래되어 온 이후 왕실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사찰이 곳곳에 세워지고 승려들이 중국은 물론 인도에까지 유학하는 등 불교 문화가 꽃을 피우자 불경 또한 수요가 크게 확대됐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사경은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신라시대의 사경으로는 백지에 먹으로 쓴《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있다. 여기에는 사경하게 된 동기 및 방법, 의식과 절차, 그리고 여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등과 신분도 적혀 있다. 사용된 종이는 얇게 뜬 닥종이로 그 질이 흠잡을 곳이 없어 신라시대 때 발달했던 제지술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납탑공양에 소요되는 사경과 불교의 번성에 따라 늘어나는 불경의 수요를 일일이 베껴 쓰는 사서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특정의 다라니경을 다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기술, 즉 인쇄술의 출현을 자극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된다.

 

(2) 금석문의 출현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세계의 각지에서는 다양한 기록 방식이 있었음을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는데, 우리 민족도 인쇄술의 발상(發祥)에 앞서 이미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록을 남겼으며, 이들 방식들이 발전하여 인쇄술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금석류(金石類) 등의 표면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이를 탁인(拓印)해 내는 방법인데, 이는 보다 발전하여 목판에 글자의 획을 반대로 새겨서 대량으로 인쇄해 내는 방법과 기술을 낳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석각비(石刻碑)로는 기원전 85년경으로 추정되는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가 있다. 그 뒤 414년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졌으며, 신라 진흥왕 때에는 4개의 순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경북 영일에서 발견된 석비는 개인의 재산 소유 현황과 사후의 재산 상속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눌지왕 27년(443)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석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각뿐만 아니라 금속으로 된 기물에도 문자가 새겨지거나 주성(鑄成) 되었다. 경주에서 출토된 청동 함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위업을 기리는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이러한 주조를 위해서는 글자를 새긴 주형(鑄型)을 만들어야 했음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 벌써 이러한 기술이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 고분 축조용으로 만든 벽돌에도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금동여래입상에도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목판인쇄술이 시작되기 이전의 것들이다. 이러한 기술은 석판에 장문의 불경을 정각(精刻)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융성해지자 석판에다 불경을 조각하거나 이를 탁본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로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화엄경(華嚴經)》을 돌에 새겨 화엄사에 소장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 경의 깨어진 석편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석판 불경은 목판 인쇄술이 출현되고 나서도 한동안 성행했다. 경주에서 발견된 석각(石刻) 법화경이나 석각 금강반야바라밀경 등은 목판 인쇄술이 출현하고 난 이후인 신라 말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판 불경은 그 경문(經文)이 석면에 음각되어 있어 탁본으로 만들어 읽을 수 있으며, 인쇄물처럼 오래 보존하고 휴대할 수도 있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서책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각의 방법과 기술은 급기야 금동판에 장문을 음각하는 기술로까지 발전했다. 신라의 금동판은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창할 때 탑지(塔誌)로서 새겨 넣은 것으로 가로 세로 각 30㎝의 사각형 판에 탑이 창건된 유래와 만든 사람들의 수와 이름, 착공하여 완성할 때까지의 연월일, 사리 장치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 전까지의 금속에 나타나고 있는 단순한 명문과는 달리 금동 사리함의 3면 내외판에 긴 문장을 음각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은 서책을 만들기 위한 인쇄의 조판과는 다르지만, 이것들이 점점 더 발전되어 목각판의 탄생을 보게 되었고 나아가 목판 인쇄술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3) 서사 재료의 활용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개발된 제지법이 전래된 이후 특산 재료인 닥나무나 마(麻) 등을 활용해 일찍부터 품질 좋은 한지(韓紙)를 생산했다. 그 중에서도 닥종이[楮紙]는 희고 두텁고 질겨서 오래 견딜 수 있음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계림지(鷄林紙), 백추지(白 紙)라고 일컬으면서 품질을 칭송했다. 백추지란 명칭은 결백(潔白)하고 질긴 백면지(白面紙)라는 특징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닥나무 껍질을 물에 불려 찧고 표백하여 점즙(粘汁)을 섞은 다음 치밀한 망으로 떠내어 말려서 만들었는데, 장지(壯紙)와 같은 고급품은 특히 두껍게 뜨고 풀까지 먹여 가공했으므로 빳빳하고 윤기가 나며 한결 질겨서 오랜 보존에도 능히 견딜 수 있었다. 먹[墨] 또한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부터 생산하여 널리 활용했다. 삼국시대에 이미 먹이 생산되었으며, 중국에까지 수출되었음이 옛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먹에는 송연먹(松煙墨)과 유연먹(油煙墨)이 있었다. 송연먹은 소나무를 태워 생긴 그을음과 아교, 물을 배합하여 제조하였고, 유연먹은 콩, 유채, 동백기름 등을 태워 생긴 그을음을 주원료로 하여 만들었으며, 이를 참먹이라고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송연먹이 생산되다가 유연먹도 나왔는데, 유연먹은 필사하는 경우는 좋으나 책을 인쇄해 내는 데는 번지고 희미하여 송연먹만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는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미 품질이 좋은 종이와 먹을 생산하여 국내의 대량 수요를 충당함은 물론 중국에까지 수출도 했다. 인쇄에 필수적인 먹과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초기의 인쇄 지식과 기술을 얻자 우리 나라에서도 이내 인쇄술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의 인쇄

 우리 나라의 목판인쇄가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느나 인쇄문화사적인 관점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이른 시기에 그 발상을 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겨레가 일찍부터 고도의 문화를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불교서적의 인쇄를 싹트게 한 것은 대내적으로는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왕조의 자주적 토대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국가정책과 영합하여 불교문화를 자못 흥륜하게 한 데 기인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 있어서의 문화명국의 위치라는 것이 불교문화의 깊이 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만큼 국제적인 경쟁정책과 호응하여 그 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한 데서 말미암은 것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기반 위에서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던 초기 단계의 치졸한 인쇄 지식과 기법을 발전시켜 목판인쇄술을 싹터 퍼지게 하였으며 이것을 이내 가능하게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여건이 고루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첫째, 금석류(金石類)의 펴면 또는 평면에 글자·부호·그림 등을 새기는 기술 그리고 그것에서 필요에 따라 탁인(拓印)하여내는 방법이 마침내 목판의 평면에 글자와 그림을 반대로 새겨서 다량으로 찍어내는 기법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 여건이 되었다. 목판인쇄가 싹트기 이전에 우리 영토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세워져 전하여지고 있었으며 또한 기물(器物)에도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겨지거나 주성되어 그러한 기술이 이미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석경(石經)의 글자는 그 기술이 섬세하고 정교하여 필력을 예리하게 나타내주고 있는바 신라 석각술(石刻術)의 우수성이 자못 돋보인다. 그리고 각종의 금동판에는 비교적 긴 문장이 양각 또는 음각의 자획으로 잘 새겨졌다. 이렇듯 금석류에 조각 또는 주성하는 기술과 거기서 탁인하여내는 방법이 목판에 글자와 그림 등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을 가능하게 하고 그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쇠붙이·돌·상아·나무 등의 재료에 부호·이름·관직명 등을 새긴 인장에 인주와 먹을 칠하여 문서 등에 찍고 또 불인(佛印)과 탑인(塔印)에 칠하여 종이에 찍어 다량 생산하였던 방법도 인쇄방법과 공통성을 지닌 점에서 목판인쇄술의 발상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장류는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며 675년에는 동으로 일정하게 주조하여 여러 관서와 주군(州郡)에 나누어주기까지 하였다. 불인과 탑인의 기록은 문헌에서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중국에는 이미 7세기 후반 초기에 인도에서 전래되었고 일본에도 8세기 전반기의 고문서에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조각기법과 날인방법은 동양에서 다량으로 소요되는 <다라니경> 등의 불서를 서사(書寫)하는 대신 소형의 나무판에 새겨 수시로 얼마든지 찍어내어 납탑공양하는 단계로 전화시키는 데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셋째,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주로 닥 을 사용하여 훌륭하게 종이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또한 목판인쇄술을 발전시킨 전제적 여건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저지(楮紙)는 희고 두껍고 질겨서 오래 견딜 수 있음이 일대 장점이다, 이처럼 양질의 한지를 일찍이 삼국시대에 생산하여 공급하였으므로 인쇄문화 발산에 큰 구실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판인쇄술을 발상하게 한 전제적 여건이 고대에 벌써 고루 갖추어졌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초기단계의 인쇄지식과 기법이 수입되자 신라에서도 바로 싹트게 되었다.

 이런 전제적 여건에서 간행된 목판본이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이 경권은 신라시대에 간행된 목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또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다.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비록 소형 목판본이기는 하나 판목에 본문과 다라니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평면으로 놓고 글자면에 먹물을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그 위를 문질러 찍어 목판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춘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 그 장정은 도서의 초기형태인 권자본이며 판각술이 정교하여 글자체의 힘찬 필력을 제법 살려주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구비한 가장 초기의 목판권자본이 되며 우리 겨레의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 수준을 보여준다.

 

3. 고려시대의 인쇄

 1) 목판인쇄술

신라 말기의 인쇄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하여 계승,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시대 인쇄의 발상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가 고려로 넘어와 국가적 종교로 승격되자, 그 진흥책이 더 강구되어 사찰이 경향각지에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종파가 점차로 확장되었으며 국민전체의 신앙도 날로 높아졌다. 따라서, 사찰의 불경간행이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여진·몽고의 잇따른 외침, 그리고 잦은 내란을 겪는 사이에 그간 간행된 귀중한 전적을 비롯한 숱한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탕진되어버렸다. 탑 또는 불복(佛腹) 중에 간직하였던 간본들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을 뿐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1007년에 간행된 총지사판《보협인다라니경 寶印陀羅尼經》이다. 이 경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판본으로서 중국으로부터 경문(經文)을 도입하고 그것을 새겨 탑에 안치하는 불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실제의 판각과정에서는 그것보다 월등하게 창의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서 정서, 정각하였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가 담긴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정각본(精刻本)이며, 당시의 간본 가운데 백미임을 자랑할만하다. 고려의 인쇄술은 해를 거듭할수록 발달하였는데, 때마침 북송에서도 10세기 말기에 동양 최초의 거질대장경인《개보칙판대장경》이 판각되었다. 고려는 1011년(현종2)에 거란이 침입하자 대장경판각에 의한 불력으로 대 국란을 타개하고자 거국적으로 발원 하여, 그 판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며, 1087년(선종4)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초조대장경은 571함 6,000권으로 거질의 한역정장(漢譯正藏)이다. 그리고 초조대장경 판각술의 우수성과 자주성은 고려전기의 인쇄문화연구에 있어서 종래 소홀히 하였던 특성의 일면을 되찾는 데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이후 고려는 계속하여 속장경, 재조대장경 등을 판각하였다.

 재조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이 1232년(고종19)에 소실되자, 다시 이를 새겨서 佛力의 수호로 몽고의 외침을 물리치고자 2차로 판각한 漢譯正藏이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시켰으며, 그 경판수는 무려 80,100여 판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비롯한 송본·거란 본과의 대교는 물론 각종의 불경목록까지 두루 참고, 본문의 오탈(誤脫)·착사(錯寫)·이역(異譯) 등을 논정하여 교정 또는 보수 한 다음 복각한 것이다. 따라서, 판각의 정교도는 초조대장경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만은 동양의 어느 한역대 장경보다 우수함이 국내외 학계의 정평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수입하여갔으며 불교전파의 초전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사이에 간행한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이라든지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등이 모두 재조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본·원본·명본 등으로 교합하였다. 이들 대장경이 현재 도처에 널리 보급, 이용되고 있으니, 고려대장경의 우수한 본문이 온 세계의 불교문화 연구 및 발전에 끼친 영향은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고려의 속장경은 漢譯正藏에 대한 동양 학문승들의 신구찬술(新舊撰述)인 제종의장(諸宗義章)과 소초(疏 )의 장경을 말하며, 그 편찬 간행사업이 문종의 넷째 왕자인 의천(義天)에 의하여 계획, 실행되었다. 그는 1085년(선종2)에 미복차림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순방하면서 장소 3,000여권을 수집하여 돌아왔고, 그 뒤 국내에서는 물론 요(遼)와 일본에서까지 두루 수집하여 4 ,000권의 장소목록인《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1090년에 엮어냈다. 한편 흥왕사(興王寺)에서는 교장도감(敎藏 都監)을 설치하고 보문의 오류와 결락을 바로 잡으면서 판각에 착수하였다. 그 판각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그 규모에 관한 기록 이 문헌에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 그가 죽을 때까지 완간 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완간문제 가 어떻든 간에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집대성하여 정장과 쌍벽을 이루게 한 것은 다른 민족이 감히 시도하지 못하였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속장경의 현존 원격본으로서는 일본 도다이사도서관(東大寺圖書館)소자의《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大方廣佛 華嚴經隨疏演義 》를 비롯하여 다이도큐문고(大東急文庫)소자의 정원본《화엄경소華嚴經疏》와 국내의《주인왕호국반야경 注仁 王護國般若經》등이 알려지고, 그 복각본으로서는 송광사를 비롯한 몇몇 곳에 여러 종이 전존되고 있다. 그 원각본을 인쇄문화사 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판각의 독자적 성격과 우수성은 초조대장경 및 재조대장경의 正藏과 비할 바가 아니다. 속장경은 이미 간행된 책을 중간(重刊) 또는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고 달필의 서예가가 판각용 정서본을 마련하여 철저하게 교감한 다음 정성껏 초각(初刻)한 조본(祖本)인 점에서 그 특징이 부각된다. 그 판각술의 우아정교도는 당시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를 잘 뒷 받침해준다.

2) 활자인쇄술

 위에서 살펴 본 목판인쇄는 나무를 베어 일정기간물에 담가 글자 새기기 쉽게 결을 삭히고, 또 쪄서 즙액(汁液)을 빼어 썩지 않게 하고, 응달에서 충분히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부서지지 않게 한 다음 대패질하여 깨끗이 쓴 판서본을 뒤집어 붙여 한자한자 새겨 내는 것이므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면서도 오직 한 문헌의 인출로 국한되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 그리하여 한 벌의 활자를 만들어 잘 보관하면서 긴요한 책을 입수하는 데로 수시로 손쉽게 찍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활자인쇄의 이로운 점을 실현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북송의 필승(畢昇)이란 평민이 11세기 전기에 찰흙으로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에서 비롯했지만 실용화에 실패했으며, 그것을 주자인쇄에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리나라는 영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데다 학문하는 이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출판공정이 간단하고 경제적인 활자인쇄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그 주자인쇄의 창안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확실치 않다. 현재 전하는 실물자료에 의하면 13세기초에 주자인쇄가 실시된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무렵에 인출된 주자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무신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진양공(普陽公) 최이(崔怡)의 명으로 중조(重彫)하여 널리 펴낸 번각본이 2종 전래되고 있어 그중 하나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록 번각이지만 새김이 정교하여 바탕이 된 주자본의 특징을 능히 알 수 있다. 무인정부는 천도한 강화에서 주자로 『상정예문(評定禮文)』을 28부 찍어냈다. 이 책은 국가의 전례(典禮)를 다룬 것으로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崔忠獻)이 보집(補緝)케 하여 두벌을 만들어 예관(禮官)과 최이의 집에 각각 한번씩 두었는데, 난리로 갑자기 천도하는 바람에 예관의 것을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해 최이의 집 것에 의해 주자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이 사실도 당시의 제1인자인 최이의 명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추호도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주자인쇄는 그후 원나라의 굴욕적인 종속정치의 자행으로 그 기능이 점차로 마비되었다. 그러다가 여말에 이르러 원이 신흥세력인 명에 의해 북쪽으로 쫓김에 따라 배원사상이 싹트고 주권을 되찾으려는 의식이 대두되자 다시 종전처럼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책은 물론 의서(醫書)·방술서(方術書)·병서·율서(律書)에 이르기까지 고루 찍어내서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하여야 한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1392년 정월에 그것이 제도상으로 조처되어 서적원(書籍院)이 생기고 주자인쇄업무를 담당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까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관서의 주자인쇄 기능이 마비되었던 사이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경사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일개 사찰인 흥덕사(興德寺)가 주자를 만들어 불서를 찍어 고려 주자인쇄의 맥락을 이어준 점이다. 그 인본으로는『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권하(卷下) 1책과『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권상하(卷上下) 2책 번각본이 전래되고 있다. 그중 흥덕사자본『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약칭서명) 권하 말미에는‘ 宣光七年丁巳(禑王3, 1377) 七月日 淸州牧外 興德寺鑄字印施’에 이어 그 뒷면에‘緣化門人 釋璨 達湛, 施主 比丘尼妙德’의 인출기록(印出記錄)이 활인(活印)되어 있다. 연화문인(緣化門人)석찬(釋璨)은 바로 이 책의 찬자(撰者)인 경한(景閑 : 1298∼1374)의 시자(侍者)이자 수제자이며, 달감(達湛)과 비구니 묘덕(妙德)도 찬자의 문인이다. 이와 같이 연화하고 시주한 이들이 바로 찬자의 문인들이니 이 책이 1377년 7월 흥덕사에서 주자인쇄 된 것이 틀림없음을 뒷받침 해준다. 이 흥덕사자본은 사찰 재래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행간(行間)이 곧바르지 않으며, 행자수가 일정하지 않는 등 초기의 고졸한 주자인쇄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세계의 공인을 받았다.

 

4. 조선시대의 인쇄

1) 활자인쇄술

 조선시대의 인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자인쇄가 고도로 발달한 것이 그 특징이다. 조선조의 관판인쇄는 중앙관서가 중심이 되어 실시하여왔는데, 오랜기간에 걸쳐 소요되는 책은 목판으로 간행한 것도 있지만 주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내어 문신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의 관서, 학교, 서원 등에 반사하고 그것이 더 필요한 경우는 다시 복각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는 인쇄정책을 써왔음이 고려 때와 견주어 크게 다른 점이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자 관제를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적을 찍어내는 일을 관장하는 관서의 직제에 있어서도 고려 말기 서적원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영과 승의 관직도 그대로 두게 하였다. 그러나 건국 직후는 신왕조의 기반이 잡히지 않았고, 또 왕권을 둘러싼 혈육간의 싸움이 지속되어 혼란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자인쇄와 같은 것은 염두에 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거국 초기에는 긴히 필요한 인쇄물에 한하여 목활자와 목판으로 찍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1395년(태조 4)에 이원길과 한노개 그리고 1397년에 심지백에게 반사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이 목활자인쇄본이고, 1397년에 반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모판인쇄본인 것이 그 예이다. 신왕조의 기틀이 안팎으로 안정된 것은 제3대왕 태종이 즉위하여 왕권을 확고히 다진 뒤이다. 태종은 우선 행정기구를 개혁하여 독자적인 관제로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억불숭유책을 국시로 하는 이념적 또는 정신적 토대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특히 숭문정책의 실천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정책의 촉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하여서는 서적을 고루 간행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일이었다. 1403년(태종 3) 2월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의 주조를 명하였는데, 이때 수개월 걸려 완성된 활자가 계미자이다. 이 계미자는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이름을 붙였으며,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그 끝은 송곳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쇄중에 자주 동요가 생겨 수시로 밀랍을 녹여부어 바로잡아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 조판기술은 1420년(세종 2)에 만들어진 경자자에서 크게 계량되었는데, 활자의 조판용 동판을 평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하여 인쇄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의 능률이 계미자보다 훨씬 증가하였다. 이 경자자의 인본은 비교적 여러 종이 전래되고 있다. 세종은 1434년(세종 16) 7월에 또다시 개주에 착수하여 큰 자와 작은 자의 동활자 20여만 개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이다. 이는 글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명정한 필서체이다.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조판용 동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개조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매워 조판하여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관주인쇄술은 세종조의 갑인자에 이르러 비로소 고도의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갑인자는 선조조 초기에 재주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전하여지고 있는 인본이 가장 많다. 이 활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조선 말기까지 보주 또는 개주되면서 주용되었다. 조선의 관주인쇄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세종조에 있어서 우리글을 창제하고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부어 국역본을 찍어냈음도 우리나라의 인쇄문화사상 특기할만한 일이다. 1447년에 인출된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그리고 1488년에 인출된 「동국정운」의 한글이 모두 고딕체의 한글활자로 정교하게 찍혀져 있다. 이 활자는 강직한 굵은 직선의 인서체인 것이 그 특징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당대의 명필가인 안평대군의 글씨를 바탕글자로 삼고 동으로 주성한 활자가 있는데, 바로 경오자이다. 안평대군의 독특한 필체가 잘 나타나고 있는 아름다운 활자이다. 이 활자는 안평대군이 형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다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그 인본이 극히 드물다. 세조는 비록 의롭지 못하게 등극하였지만, 그가 인쇄문화 발달에 기여한 공헌은 참으로 컸다. 1455년에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글씨로 삼아 동으로 활자를 주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을해자이다. 이 활자에서는 한글활자가 아울러 사용되어 많은 국역서가 인출되었으며, 임진왜란 직전까지 갑인자 다음으로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인본이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16세기로 접어든 중종조에 있어서는 종래 사용하여오던 동활자에 없어진 것이 생겨 목활자의 보충이 많아졌고, 또한 마멸이 심하여 쓸 수 없게 된 것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자치통감≫에서 글자모양이 가늘고 크기가 적절한 것을 골라 바탕글자로 삼고 활자를 새로 주조할 것이 발의되는 동시에 1516년(중종 11) 1월에 주자도감이 설치되고, 4월에는 그 업무를 맡아보았던 낭관들에게 논공행상까지 하며 활자의 주조를 진행시켯던 것이나, 5월에는 심한 가뭄으로 주자도감이 혁파되었다. 이때 주성된 활자의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를 흔히 병자자라 일컫고 있다. 조선 전기에서 고도로 발달하여온 활자 인쇄시설은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완전히 파괴 또는 소실, 약탈되었다. 정조가 집정할 때부터는 문예부흥정책에 치중하고 역대 선왕의 인쇄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썼기 때문에 조선 후기 활자인쇄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하였다. 중국의 사고전서에 들어있는 ≪강희자전≫의 글자를 바탕으로 삼고 나무활자 32만개를 만들어냈는데, 이를 생생자라 일컫고 있다. 그 새김이 정교하고 글자체가 아름다워 1795년에는 이를 자본으로 하여 동활자를 주성하였다. 정리자 또는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묘자라 일컬으며, 크고 작은 활자를 합쳐 30만자였다. 관서에서의 활자주조는 위에서 든 것이 마지막이다.

 

2)목판인쇄술

 조선조의 관판본은 활자인쇄에 의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활자인쇄는 인출 부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요구되는 책을 넉넉히 공급하여 줄 수 없었다. 그 결과 목판인쇄가 아울러 촉진되었다. 더욱이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숭유정책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기 위하여서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역사·시문 계통의 서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펴내어야 하였다. 주자소에서 찍어낸 활자본, 또는 중국에서 도입한 책을 복각 또는 판각하여 그 책판을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찍어내어 두루 공급해주어야 하였다. 목판인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세종이 즉위한 때부터였다. 그 전래본을 보면, 왕명으로 간행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새김이 대체로 정교하다. 종이도 정성껏 떠서 튼튼하고, 먹색도 시커멓게 윤이 나서 선명하다. 중앙관서에 있어서의 목판인쇄는 주로 주자소와 교서관, 규장각이 담당하여왔다.

結論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인쇄는 8세기초에 목판인쇄술을 시작으로 고려시대 금속활자인쇄술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목판인쇄술은 글자가 만들어지고 책을 제작할 단계까지 발달하면서 처음에는 글을 옮겨 베꼈으나 잘못 베끼거나 줄을 빠뜨리는 일이 발생하자 목판에 새기게 되면서 발달하였다. 신라시대에 판각된《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시초로 고려의《초조대장경》,《재조대장경》,《속장경》이 판각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목판인쇄는 불경의 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왕조의 자주적 토대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국가정책과 영합하여 불교문화

를 훌륭하게 한 데 기인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 있어서의 문명국의 위치라는 것이 불교문화의 깊이 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만큼 국제적인 경쟁정책과 호응하여 그 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한 데서 말미암은 것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활자인쇄 술은 목판인쇄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금속기술이 발달해야 했다. 이에 금속기술이 발달한 고려시대에 활자금속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활자인쇄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주제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고루 찍어 널리 반포하여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민간에서까지 활자를 다양하게 만들어 인쇄하게 되어 서민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이러한 인쇄는 인류의 두뇌·학문·과학 및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자·광선·자력 등으로 인쇄물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식 연활자가 출연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목판과 활자판의 인쇄가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목판과 활자인쇄술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뛰어난 문화재이다.

▣참고자료

손보기, 한국의 고활자,  보진재,    1992

김두종, 한국 고활자 개요,  探求堂,   1974

송병기외, 한국사의 이해,  신서원,    199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6,  탐구당,   1975,  

손보기, 금속활자와 인쇄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천혜봉, 라려 인쇄술의 연구, 경인문화사, 1996

천혜봉, 고인쇄, 대원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