朋黨政治의 대하여

 

                       

                                            ·학    번: 20010396

                                            ·이    름: 임승희

 

[목   차]

  序論

  本論

    1. 朋黨政治의 개념

    2. 朋黨政治의 發生배경

    3. 朋黨政治 전개과정

    4. 朋黨의 대립과 政權交替

    5. 朋黨政治의 변질 배경

    6. 朋黨政治의 영향과 결과

    7. 蕩平策의 등장

 結論

                

 

 서론

 조선 중·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당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일제 식민 사학자들은 조선의 정치사 중 4색 당쟁 사를 부각시켜 우리 민족성 중에 분파성이 있다고 하는 왜곡된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영원 불변의 민족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파벌간의 대립은 어느 민족사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최근에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붕당 정치 발생의 사회·경제적 배경,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른 전개 과정을 규명하고 있다.  16세기초의 잦은 사화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정치적·학문적 대립이라면 붕당정치는 사림세력 간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학통·지연 등을 둘러싸고 분열현상이 나타나 대립된 세력간의 지속적인 대립으로 16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나 주로 17세기 이후에 격화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이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지방에 있던 사람 양반들은 정치에 참여하기를 열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직의 수는 일정하였기 때문에 양반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큰 직책은 아니었으나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기성 사림관료들이 농장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신진관료들은 토지분배문제를 둘러싸고 불만이 쌓이게 되어 붕당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어떻게 행해졌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그 변화에 대해 고찰해 보자.

본론

  1. 붕당정치의 개념

 붕당정치(朋黨政治)란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이념이 같은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고, 언론활동을 통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붕당이란 붕(朋)과 당(黨)의 합성어로서, '朋' 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던 무리를 말하며,‘黨’은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가리킨다. 원래 《시경(詩經)》에는 <무리> <동류(同類)>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관자(管子)》 <법금(法禁)>에는 <붕당을 만드는 것을 벗을 사귄다 하고, 악(惡)을 가리는 것을 인(仁)을 실천한다>고 하여 당파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순자(荀子)》 <신도(臣道)>에서는 <붕당을 만들어 끼리끼리 친하며 임금을 둘러싸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기를 일삼는다>고 하여 붕당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지적대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고관들이 자기 파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붕당을 만들고, 자기 붕당과 의견이나 이해(利害)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서로간에 붕당이라고 공격하며 죄인으로 몰아서 추방하거나 처형한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때의 구양수(歐陽修)는 이러한 부정적 당파성을 지닌 붕당정치를 지양하기 위하여 《붕당론》을 썼으며, 청(淸)나라 때의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3∼35)는 《어제붕당론(御製朋黨論)》을 지었다.  한국에서는 지방별 이해관계, 학문의 계통에 따른 견해차, 연령·직위의 고하(高下)에 따른 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그에 반대되는 집단과 대립·반목하기 시작한 것이 당쟁이다.

  2. 붕당정치의 발생배경

 사림이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지방에 있던 사림 양반들은 정치에 참여하기를 열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직의 수는 일정하였기 때문에 양반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기성의 사림관료들이 농장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신진관료들은 토지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이 때문에 큰 직책은 아니었으나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직을 놓고 당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림들은 선조 대에 이르러 정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사림내부의 기성관료와 신진관료 사이의 분열이 장기화됨으로써 붕당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3. 붕당정치 전개과정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이 영수(領袖)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남인·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宣祖)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입상(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稶)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이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庚申換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 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 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壬午事件), 즉,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영조가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간의 대립이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카톨릭을 믿는 신서교파(信西敎派)와 믿지 않는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신장되어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學徒) 내지는 실학자(實學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廢族怨國 :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음)의 무리가 되어 과거(科擧)를 위한 유학(儒學)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4. 붕당의 대립과 정권교체

시기

원인

결과

선조

이조 전랑직 타툼

 

동·서인으로 분당

 

광해군

중립 외교(북인)

 

인조 반정(서인집권)

 

인조

친명 배금 정책, 척화주전론 주장(서인)

 

 정묘·병자호란

 

효종

북벌 운동 추진

 

서인집권

 

현종

예송논쟁

 

1차-서인 승리

 2차-남인 승리

 

  5. 붕당정치의 변질 배경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가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붕당 자체가 조선의 정치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17세기 중엽까지는 이러한 원리가 비교적 잘 지켜져서 정국이 안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경신환국을 계기로 붕당 정치의 초점은 공론(公論)과 공도(公道)의 추구에서 벗어나 오로지 정권 획득에만 집착하게 되어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당 전제화가 나타난 표면적인 이유는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적 변화도 크게 작용하였다.

 사림세력이 붕당 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인적인 토대는 향촌 사회의 서원과 향약이며, 경제적인 토대는 농장이었다. 이렇듯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또 농장을 바탕으로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는 농경지의 복구와 농법 개량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고 장시의 발달과 화폐 유통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주제와 신분제를 크게 동요시킴으로써 사림 세력의 향촌 지배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붕당 정치의 안정된 토대를 위협받게 되자 사림 세력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권력 독점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한 이앙법이 보급됨에 따라 농민들의 향촌 공동체인 두레와 계 등이 활성화됨으로써 사림의 향촌 지배권을 약화시켜 이 또한 일당 전제화를 촉진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6. 붕당정치의 영향과 결과

 초기의 붕당 정치는 정치 이념, 학연 등에 따라 조직 상대세력과의 공존을 추구 언론을 통한 비판 허용 공론과 공도를 추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 확대에 기여하여 정치 세력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의 기능을 가졌으나, 경신환국 이후에는 일당 전제 정치가 실시되면서 국리민복 보다 자기 당파의 이익을 우선 시하고 이념보다는 학벌, 문벌, 지방의식과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었으며, 상대 붕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가 빈번하였고 외척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으며, 왕위 계승 문제가 정쟁의 초점이 되는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벌열(閥閱)가문의 정권 독점으로 양반층의 분화(집권 양반, 향반 몰락양반)와 자기 도태화가 심화되어 다수의 양반이 몰락하는 한편, 경상도 지방의 서원 난립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왕권의 약화를 가져와 정치 기강 문란을 초래하여 세도 정치를 잉태하게 되었다. 

  7. 탕평책의 등장

 숙종은 재위 말년에 노론 소론의 치열한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한 탕평책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탕평책은 불완전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사건은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교체시키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그치고 말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갑술환국 이후에는 서인 일색으로 정치 세력이 불균형을 이루어 붕당정치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즉 여러 붕당이 공존하면서 상대 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붕당의 원칙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단명으로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의 본격적인 탕평책을 시행, 여러 당파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다. 영조는 당쟁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누구든 당파를 위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하면 무조건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영조 4년(1728년) 소론과 남인이 연합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청주가 점령되는 사태에 이르자 노론이 중용되고 그후에는 사실상 노론 천하가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분쟁은 계속되어 결국 사도세자의 폐위 사건이 발생하였다.(영조 38년, 1762년) 사도세자는 학문을 게을리 하고, 궁녀나 내시를 함부로 죽이며 기녀와 여승을 희롱하는 등 영조의 마음을 거스르는 행동이 잦았다. 고집스럽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인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유례가 없었던 궁중 참극이었다.(영조 38년, 1762년)

 사도세자 폐위사건은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정쟁에서 비롯되었다. 국왕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당쟁에 강력히 대처하자, 당쟁의 초점이 다음 대를 기약하는 세자 책봉 문제로 비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은 세자 시절부터 노론의 횡포를 공공연히 비판했던 사도세자에 대해 노론이 집요한 공격을 퍼부은 결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이를 정당시하는 벽파로 갈라졌는데, 소론과 남인은 시파에 속하고 노론의 대부분은 벽파로 갈라졌다.  영조가 죽기 전까지는 노론 벽파가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시파가 정계를 장악하고 여기에 남인 시파가 등용되어 오랜만에 남인 세력이 등장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동정했던 시파를 가까이 하였다. 탕평책은 정조에 의해 계승되어 어느 정도 인재의 고른 등용이 이루어져 당쟁을 완화시키는데는 기여하였다.  그러나 영정조시대의 탕평책은 유능한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인위적 균형을 이룬데 불과하였다. 조선 후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왕권의 취약함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영정조의 탕평책의 이면에는 치열한 왕권 강화 노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영조가 병권을 장악했던 것이나, 정조가 장용영이란 친위부대를 창설했던 것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1801년) 권력은 다시 노론 벽파에게로 넘어갔다.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남인 시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신유사옥, 순조 1년, 1801년) 노론 외척의 일당 독재인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권이 약화되어 세도정치라는 파행적인 정치형태를 낳았으며 이는 대원군에 들어서야 완화되었다.

   결론

 붕당정치는 지배층의 관직 쟁탈전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붕당정치를 통하여 정치가 활성화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당쟁과 같은 소수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이 그 시대의 역사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다. 더욱이 노론 외척 일당에 의한 세도정치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민란이 빈발하였던 데 비하면, 견제와 비판으로 집권당의 실정을 방지하는 붕당정치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일반화되면서 의리와 도덕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명분론과 허례에 빠져들었다. 또한 반대당에 대한 포용성이 결핍되어 조선의 사회, 문화는 차츰 탄력성과 개방성을 잃어갔다.   계속되는 당쟁으로 인해 국가를 위한 이념보다 학벌, 문벌, 지방의식으로 연결되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가, 사회발전에 지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조선의 붕당정치는 서로 간의 견제 속에서 발전한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은 사림 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붕당 정치의 직접적 요인은 1575년(선조 8)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이조전랑(吏曹銓郞) 관직을 둘러싼 암투였다. 이후 계속된 당쟁의 기반은, 당시 정치인들이 지방에 물질적 토대로서 농장을 소유하고 서원이나 족보를 통하여 파당의 결합을 굳게 하였던 데에 있었다.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 등 사색(四色)으로 나뉘어 벌어진 붕당의 분열은 세자책봉 문제처럼 사회성이 결여된 관념적인 정치론을 주제로 하여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는 공존과 상호비판의 원리에 충실하게 이루어진 선조 이후의 중세적 정치운영의 후기적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곧 17세기 후반 이후 붕당정치의 파탄은 근대적 정치질서의 모색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자료

이성무 저,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이성무 저, 조선시대 당쟁사 2, 동방미디어, 2001

이덕일 저, (당쟁으로 보는)조선역사, 석필출판사, 1997  

변태섭 저,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1

정석종 저,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강재언 저, 조선의 사학사, 민음사, 1990               

국사편찬위원회 저, 한국사, 탐구당,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