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 儒學과 性理學의 성립과 발달

                                  

                                            ·학    번: 20010366

                                            ·이    름: 양월운

 

 [목   차]

  1. 머리말

  2. 儒敎의 성립과 발달

  3. 性理學의 성립과 발달

  4. 국가체제를 건설한 훈구파 성리학자들

  5. 유학 및 성리학관련 인물

  6. 서원과 향교

  7. 맺음말

 

 

1.머리말

  조선왕조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다음과 같은 3대 정책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 첫째, 외교정책으로서 事大交 主義를 채택하고 둘째, 경제정책으로서 農本民生主義를 채택,건국 초부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에 노력하였으며, 셋째, 문화정책으로서 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유교를 정치·문화·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과거·의례가 유교적인 체제로 바뀌어가면서 조선시대는 사회 전반적으로 유교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후에 性理學으로 발전하게 되어 조선특유의 유학적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본론에서는 유학의 성립과 발달, 성리학의 발달과정등을 기술, 유학과 성리학에 의해 나타난 조선사회의 특징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儒敎의 성립과 발달

  東方지역에 형성된 아시아만의 독특한 文化라고 하면 유교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문화를 이른바 유교문화권이라고 명명하지 않는가! 유교는 春秋시대 魯나라의 학자 공자에게서 창시되었다. 유교의 성립을 공자의 일생과 함께 관련시켜 알아보도록 하자. 周의 靈王년(B.C 552)에 魯나라(지금의 산동성 曲阜에서 탄생한 공자는 52세때 中都의 宰라는 벼슬에 오르게 되고 이듬해 夾谷에서 열린 齊나라와 魯나라의 회담에서 제나라의 책략을 분쇄하고 노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공로로 大司寇라는 재판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공자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노나라의 임금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노력을 하다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이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56세(B.C. 470)때 공자는 母國인 노나라를 떠나 14년간 유랑생활을 하면서 그의 이상인 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덕있는 임금을 만나 그를 도와 仁政을 베풀어 천하를 바로잡아보려 했으나 끝내 달성되지 못하고, 이에 공자는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 즉 지식인들의 양성과 아울러 저술에 뜻을 굳히고 69세(B.C. 484)에 다시 노나라로 귀환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易經(인생철학을 논한 책), 詩經(고대의 시가를 수집, 정리), 周禮(周代의 문물제도와 이에 부수된 사행을 기술), 書經(상고시대부터 하, 은, 주 삼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문헌을 수집, 정리함), 春秋(232년에 걸친 春秋시대를 編年體로 엮은 역사서), 樂記(음악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한 책)가 있고 이를 六經이라 이른다.   유교의 가르침은 ①신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인간정신의 계발과 수양을 강조(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인격적 수양,中庸之道의 실천)하고, ②인간사회를 다스리는 정치적 원동력을 권력이나 법에서 찾지 않고 천도를 바라보는 문화적 제도인 禮와 眞善美의 조화의 극치인 자연미의 감화력을 지닌 樂으로써 정치와 제사를 일치시킨 祭政一致와 정치를 감화와 교육으로 이끄는 政敎一致의 이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③천도에 따른 人倫위에서 교화함으로써 스스로 따르게 하는 王道政治를 강조하고,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위정자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수양하고 학식을 쌓고 德行을 닦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修身齊家治國平天下). 공자가 죽은 후 그는 봉건사회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을 뿐 아니라, 「素王」또는 「至聖先師」로도 추앙되어 그의 명예는 2천년간 지속된다. 1911년 중국 최후의 봉건왕조인 淸나라가 쓰러진 후 특히 1019년의 「五四運動」이후 新文化運動에서는 유교사상을 봉건사상의 잔재로 보는 등 공자에 대한 인식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상적인 식견으로 공자를 낡은 사회와 가치관을 옹호하는 비진보주의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비현실적·비합리적 처사를 반대했을 뿐, 또한 전통 위에서의 새로운 창조를 주장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발전적 성장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중국대륙과 접하여 일찍부터 발달된 한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흔히 유학이라 함은 조선시대의 사회에 퍼져있고, 조선시대 때만 활성화 됐듯이 느껴지지만 실제로 유학은 과거로 돌이켜 보면 고조선을 거쳐 한 군현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한문화가 전래되었고, 그들의 문자인 한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에 내려오면 한문화는 더욱 보급되어 한자사용에 따른 漢學이 일어나고 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건국의 주체는 여말의 신흥사대부들로써 이들은 구세력과 정치·경제적으로 이해가 상반되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대립하고 있었다. 高麗에 주자학의 정치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은 당시의 고려 권문세족과 결탁해 왔던 佛敎를 배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정치이념이나 그 방향은 곧 유교정치의 추진이었다. 특히 세종(1418~1450)때에는 이러한 정치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책을 강구함으로써 유교문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즉, 세종대에는 유교교양에 철저한 인재의 양성 및 이에 입각한 문물의 정비와 전통문화의 정리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종은 유교윤리를 사회에 널리 보급하고 이에 실천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즉, 4都學堂의 제를 확립하고 왕족인 종친의 교육을 위해서 별도로 宗學을 설립하여 유교교육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三綱行實圖 , 孝行錄 등을 간행 보급하여 효 사상을 전파하는데 크게 힘썼다. 또한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의례들은 모두 주자가례에 준행 하도록 하기 위하여  國朝五禮儀 를 간행하였다. 조선 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고, 왕도 정치는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서, 사회 질서를 중시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가족 제도에 종법 사상이 응용되었다. 즉, 신분적으로 양천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이에 따른 직역을 법제화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 원리가 점차 보편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농민 지배를 허용하는 사회 경제 관계를 관철시키려 하였고, 그리하여 지배층이 농업 경영에 참여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경제 관계에서도 작용하였다. 국제 관계에서는 평화 추구의 친선 정책을 기본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제적 긴장 관계를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적 생활까지도 유교 사상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고려이래 사회 관습상의 잔재로 이상적인 유교 이론을 수용하는 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민 사회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 등이 그대로 잔존하였다.

3. 性理學의 성립 및 발달

  조선 유학의 특징은 性理學의 발달에 있다. 성리학은 宋나라 朱熹가 집대성한 것으로서 字句석에 치중하던 종래의 유학과는 달리, 우주와 인간의 근본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유학으로, 고려 말 한국에 전래되었다.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유학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관학파는 勳舊派라고도 하는데, 국가창업 과정에 기여한 정도전  河崙  權近 등과 그의 제자들로서, 집현전  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특히 詞章에 능하였다. 鄭麟趾   崔恒   申叔舟   梁誠之  서거정 등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편,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는데 사장 중심의 훈구파와 달리 經學에 치중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사림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사림들은 초야에 은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에만 힘쓰고자 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16세기 이후 심오한 철학적 논쟁이 피어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主氣派와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主理派의 두 계통으로 발전하였다. 주기파는 徐敬德에서 비롯되어 李珥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여 정치  경제  국방 등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주기파는 이이의 벗인 成渾   宋翼弼과 그의 제자인 金長生   宋時烈 등 이른바 畿湖學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한편, 주리파는 李彦迪에게서 비롯되어 李滉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리파는 이황  曺植 이후 金誠一   鄭逑   許穆 등 영남학파에 의해 계통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17세기에 이르러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를 중요시하여 喪葬祭禮에 관한 禮學으로 발전하였는데, 기호학파에서는 김장생   송시열이, 영남학파에서는 정구  허목이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은 기호학파가 정권을 주도하면서 주기설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權尙夏의 문하에서는 인간의 심성문제를 둘러싸고 큰 논쟁을 펴기도 하였다. 韓元震   李柬 등이 당시 心性論의 대가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의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주리설이 대두되어 衛正斥邪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부여하였다. 李恒老  奇正鎭 등은 19세기 중엽의 대표적 위정척사 운동가였다. 성리학의 발달과 아울러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운동도 일어났는데, 尹稶   朴世堂  정약용 등은 유교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鄭齊斗를 중심으로 한 江華學派에서는 陽明學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조선사회에서 그 지위를 굳히지 못하였다.

4. 국가체제를 건설한 훈구파 性理學자들

  권근과 정도전 두사람은 모두 고려말 유배시절에 농부의 위로를 받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공통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 체험은 권근은 〈농부의 위로〉, 정도전은 〈소재동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로 남겨져 있다.) 이 기록들은 이들이 사대부와 일반백성들이 서로 어우러져 잘 살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 까닭에서인지 두 사람은 농민들이 종교로 받아들인 불교, 도교, 그리고 강력한 군주권을 바탕으로 사회개혁을 도모한 漢唐儒學등을 성리학과 절충하는 경향을 보였다. 단지 정도전은 모계가 천인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서인지 권근에 비해 농민의 입장에 서서 자작농 중심의 사회를 구상했던 것이다. 반면에 권근은 유명 문벌출신이라는 점에서인지 보다 사대부 문벌의 입장에 서서 중소지주 주도의 사회를 구상했다.

 아무튼 정도전과 권근으로 대표되는 훈구파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국가체제를 완성하였고, 세종~성종년간의 치세를 보좌하였다. 곧 중국 고금의 정치와 문화, 세계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문화, 사라센의 과학문화까지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성리학 국가체제를 건설한 것이다. 그들 중 황희, 맹사성, 윤희 같은 인물은 청렴한 재상으로 학문에 부지런하고 의리에 밝은 것으로 이름이 높고, 권근의 외손인 대학자 서거정은 중국에까지 당대의 문장가로 널리 알려졌다. 서거정은 특히 역사시대 이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장을 모은  東文選 , 우리나라 최초로 고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통사로 쓴  東國通鑑 을 편찬하는데 공적을 남겼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서거정은 중국의 학문적 업적이라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들은 이들을 새로운 성리학적 인간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훈구파 성리학자들은 남송을 멸망시킨 몽고족의 원나라를 통하여 남송 주자의 성리학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의 건국에 협조했는데, 이런 까닭에서인지 사림파들은 이름을 바르게 하고 고결한 절개를 지키는 성리학적 인간에 타당치 않은 학자들이라 하여 훈구파 성리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 곧 훈구파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적 국가체제를 만들었으면서도 조선사회의 토착 성리학파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토대를 놓는 역할만을 담당한 것이다.

5. 유학 및 성리학관련 인물

⑴ 정 도 전

 본관 奉化. 자 宗之. 호 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忠州司錄을 거쳐 典敎寺主簿 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成均司藝   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李仁任   慶復興 등의 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都指揮使 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聖節使 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成均祭酒, 이듬해 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昌王을 폐위하고 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經延知事로 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   三司副使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曺敏修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 나와 조준   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門下侍郞贊成事   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 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鄭摠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三峰集》《經濟六典》《經濟文鑑》《心氣理篇》《佛氏雜辨》《心問天答》《陳法書》《錦南雜題》등이 있고, 작품에 〈納氏歌〉〈靖東方曲〉〈新都歌〉등이 있다.

⑵ 이 황     

 본관 眞寶. 초명 瑞鴻. 자 景浩. 초자 季浩. 호 退溪陶翁退陶淸凉山人.시호 文純. 경북 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式年文科에 乙科로 급제하였다. 副正子博士 戶曹佐郞등을 거쳐 1539년 修撰 正言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舍人으로 文學 校勘 등을 겸직, 掌令을 거쳐 이듬해 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乙巳士禍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司僕寺正이 되고 應敎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쳐 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李彦迪의 主理說을 계승, 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理 氣 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形而下的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乘은 것은 7情이라고 주장하였다. 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純粹理性은 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柳成龍 金誠一 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嶺南學派를 이루었고, 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스스로 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丹陽의 丹巖書院, 괴산의 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陶山十二曲》,글씨에 《退溪筆迹》이 있다.

⑶ 이 이

  본관 德水, 자 叔獻, 호 栗谷 石潭, 시호 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陶山으로 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별시 에서  天道策 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東湖問答》《萬言封事》《聖學輯要》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箕子實記》와 《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 서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大寺洞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紫雲書院과 강릉의 松潭書院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6. 서원과 향교

  성리학을 공부하였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서원과 향교가 있었다. 종종 서원과 향교를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의 차이는 한마디로 서원은 사설 교육 기관이고, 향교는 관학교육 기관이라는 것이다. 서원과 향교 모두 다 선현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기능, 강학을 하는 학교의 기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에 향촌자치 운영기구였다.  서원의 주요 교육은 성리학 본래의 성격과 같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들은「소학」부터 읽기 시작하여「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의 순서로 배웠다. 이렇게 하여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 서원에 따라서 「가례」「심경」「근사록」「사기」등을 읽어 뜻을 넓히는 교육을 하였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의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세운 백운동 서원이었다고 하는데 이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로 임금님이 직접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 되었고 현재의 영주 소수서원이다.  향교에는 공자를 모시는 大成殿, 선현을 봉안하는 동 서무(東西)로 구분되는 문묘, 강학의 장소인 명륜당, 동 서재로 구성된 기숙사, 제사를 관장하는 典祀廳등이 있다. 7.맺음말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옳은 말이기는 하나 이 뜻은 현재 유교가 지배체제로 우리나라의 중심적인 체제 이념이나 절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통된 문화를 뽑아 내다보니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고조선대, 한군현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되기 시작되어 조선시대엔 전반적인 정치지배체제, 국가유지체제가 된 유교나 성리학은 사회구조가 변하고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분명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500년전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국가체제의 절대정신이었으며 가장 중요시되는 학문(성리학)이기도 하였고, 유학 또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을 선비라고 높여 칭하기까지 했던 중요한 학문이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유학이라고 하는 공자의 학문 때문에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에 시달려 조선이 끝내 비참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 유학과 성리학은 조선의 600년 역사를 이끌어온 중심 철학이었으며 행동과 실천의 규범이기도 하였으며 그 자체로 사회질서가 유지되었던 학문이다. 그 중요성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학문이 현재 일본에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 연구대상인 것에서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유교는 그 사회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국가 발전에 길을 닦아주었다. 유교는 그 당시 상황에서 필요에 의해 국가이념으로 채택되었고 또한 사회반영에도 적절히 하였다. 비록 이 학문이 백성들과 양반들이 함께 어울려져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현재계급의 차가 없는 것은 과거 소위 선비들이라고 불리우는 유학자나 성리학자들의 노력해 의해 지금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각으로 구체제의 산물이니 불평등계급사회의 원인이 되느니 하는 무조건적 비판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며, 단지  우리는 현재시각의 잣대로 유학과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평가하기보다는 이들 학문이 쓰였던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평가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참고자료

金忠烈, <三國時代의 儒敎와 儒學> 高麗儒學史 , 고려대출판부, 1984.

鄭奭鍾,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회 , 한길사, 1995

邊太燮,  韓國史通論 , 삼영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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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역사연구모임,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 , 명진출판, 2000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 푸른역사, 1998

金吉煥,  조선조 유학사상연구 , 일지사, 1980

劉奉學,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 신구문화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