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의 정자문화

 정자는 전국토에 걸쳐 고루고루 분포하고 있고, 대개 현존하는 것들은 14세기 이후의 것들로써 지금도 도처에 정자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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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중에서도 호남지역의 정자문화에 대하여 알아보면,호남의 진산 무등산 자락은 무유등등(無有等等)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빛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시냇물처럼 맑은 시심을 일구기도 했고 구국의 의혼을 태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창평    ◎면앙정들판을 적시며 담양고을로 흘러가는 원효계곡은 조선조 16세기 사림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으로 이름높다.

 무등산에서 뻗어내린 다른 계곡과는 달리 원효계곡은 일찍부터 전대의 사찰문화를 누르고

새로운 사림문화를 일으켜 세웠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 명옥헌, 송강정,

면암정 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정자(亭子)와 원림(園林)이 아름다운 자연을 뜨락 삼아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을  '정자문화권' 또는 '가사문학권'이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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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곳은 자연을 음풍농월하고 시문의 창작                 

◎식영정 에만 치우쳤던 곳이라기보다 당대 지식인들의 총체적인 문화활동의 장소로서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산실이기도 하다. 우리시대에 와서 풍류라 하면 으레 전문 기능인들의 여흥이나 질펀한 흥취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옛 시절의 선비들에게 도학과 문예를 겸비한 도량으로서 자연속에서 자신을 수양하고 완성해 가는 행위의 모든 것을 마땅히 풍류라 불렀다. 계산풍류란 이곳 원효계곡에 머물렀던 은둔지사들의 총체적인 삶을 아우르는 말이다.

 무등산 계곡에서 계산풍류가 발원하고 호남의 사림층이 한 무리가 되어 집결하는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영산강 상류지역의 넒은 들판과 이어져 있는 풍요로

운 경제력과 정자터로 안성맞춤인 자연적 조건이었다.

 생리가 넉넉하고 산 좋고 물 맑은 계곡의 풍치는 자연스럽게 한문을 도야하고 풍류를 즐기려는 장소로 주목되었으며 특히 이곳에서 세거하였던 제주 양씨, 광산 김씨, 지실(영일) 정

씨 들의 가계에 전해지는 '참깨로 만 석을 했다.'는 식의 구전은 바로 그들의 경제력이 계산

풍류와 정자문화를 가능케 했던 후원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6세기 조선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사적 소용돌이가 합류해왔다. 중종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내세우던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된서리를 맞는 기묘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기의 사화와 후기의 당쟁을 빼놓을 수 없다.

사화는 중소지주적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사림파와 대토지소유층인 훈구척신간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고 당쟁은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내부에서 일어났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다.

 사림파의 뿌리는 고려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출발시키던 때부터 이어진다. 고려말대지주 문벌귀족에 대항하여 조선왕조를 성립시킨 신진 사대부들의 후예들이 다시 왕권 주위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부패해 가기 시작하자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은둔했던 고려말 충신들의 후예들이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정치적 박해를 면치 못하였으나 무오, 갑자, 기묘, 을사년의 사화를 통하여 세력을 형성, 급기야는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조선 유학의 역사에서 기묘사화는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사림파의 종장인 정암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온 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게 된 것이다.

조광조의 죽음은 사림파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서둘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둡고 답답했던 인고의 세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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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정자와 누정을 짓고 그곳에 모여 학문을 논하  

◎취가정거나 시작(詩作)을 주고받으며 불우한 시대를 달랬다.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자리잡은 계산풍류는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른 호남 사림의 나름대로의 대응양상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산중에 은둔하였으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깊은 통찰력을 통하여 16세기 사림문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놓았다. 그리고 무등산계곡의 정자는 그들, 사화의 계절을 살다간 지식인들이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였던 거점이었다.

 그 시절 호남 사람의 혼을 빚내며 계산풍류를 일으킨 첫 번째 정자가 소쇄원이었다. 소쇄원의 역사를 기록한 「소쇄원사실」에 따르면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고봉 기대승 등 호남 사림을 대표하는 거장들과 영남의 퇴계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쟁쟁했던 은둔지사들이 소쇄원 제월당을 통하여 교류하였던흔적이 남아있다.

 16세기 조선 정치사의 암흑기를 맞았던 사림파들은 자연에 은둔한 삶속에서도 절치부심, 중앙 정계 탈환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전통정원이나 원림의 기능에 주안하여 소쇄원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좀더 확대하여 16세기라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격동기를 살아왔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사상적 체취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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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되었을때만이 소쇄원이라는 정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소쇄원의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절묘 ◎한벽당 한 조화는 바로 그들 사림파들의 정신세계에 다름아니며 그러한 문화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권력투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벼슬길이 막혀 낙향한 선비들이 자신의 삶터에 그 나름대로의 이상세계를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사랑과 애정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소쇄원의 모습이고 그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정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개별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소쇄원을 중심으로, 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던 한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정자가 들어선 자리는 언제 가봐도 운치있고 산수가 빼어나다.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윽하고 고생창연한 자태는 날아갈 듯 처연하기만 하다. 그 이름도 산이나 강, 달과 구름, 나무, 바위가 어우러진 자연의 청취가 흠뻑 적셔져 있다. 풍류를 아는 길손이라면 누군들 그곳에 머물러 세상사 시름을 달래 보고 싶지 않을까.

 정자란 본래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다.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주택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양반들이 놀아나던 별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고 유서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다.

 딱히 어떤 종류의 건축으로 구분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다른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적 의미와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른바 노동하는 일상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았던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문화가 싹트고 뿌리 내리던 구심점이 정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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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소이자 문학예술의 산실이기도 했고 덕망높고 스승의 승모처이기도 했다. 더 넓은 의미로 정자는 향악을 시행했던 향약소(鄕約所), 씨족의 대소사를 논하던 종회소(宗會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정자는 그 시절의 정신사적 의미와 예술적 향기는 사라져 버렸고 빈집의 퇴락함으로 남아있지만, 그러나 이른 초봄이나 늦가을 또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눈발 날리는 겨울날 정자게 가 보라. 여름일지라도 왁자지껄했던 인파가 돌아간 후 수묵처럼 어둠이 번지는 밤 정자의 마룻바닥에 앉아보라. 거기 천년 그대로의 뭇별이 쏟아져 내리고 풀벌레 소리 귀에 쟁쟁할 때 옛모습 그대로의 정자가 살아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푸른 소나무 벗하며 살던 옛 선비들의 체온이 소슬한 밤기운처럼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