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영200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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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은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장군 장보고(張保皐)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서 장보고는 일찍이 당(唐)나라의 쉬저우[徐州](중국 장쑤성[江蘇省] 북서부에 있는 도시)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가 된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분개,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청해(淸海:莞島)에 군영(軍營)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쾌히 승락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하였다(828).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중국과 일본 해로의 요해처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城)을 쌓아 항만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중국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들어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결국 청해진은 중계무역장 으로서 서남 해로의 요해처 구실을 하였다.

청해진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바람·해류·조석 등의 자연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이를 활용한 자연적 기지 였으며 동·서 만남의 장이 되었다.

장보고는 중국으로 유입되는 아라비아·페르시아·동남아시아지역 등의 무역품과 당의 무역품을 신라로 가져오고, 신라의 무역품을 이들 지역에 수출함. 또한 양국의 무역상들 이 중국 현지에서 서로 왕래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 교류가 이루어졌다.

원래 청해진은 신라인들을 노예로 매매하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설치 하였는데 청해진 설치 이후로 신라의 무역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전의 신라의 무역은 국가 관리로 이루어지는 공무역 형태였으나 청해진의 설치 후 개인 관리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형태로 전환 하였다.

이러한 청해진이 가지는 의의는 폐쇄주의를 무너뜨리고 개방주의에 의한 세계화를 이룬 초석 (신라귀족들의 정치 미숙으로 청해진이 폐쇠됨으로써 조선시대까지 폐쇄주의 정책은 유지됨)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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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과 관련된 정확한 표현 정리>

① 장도 : '청해진'이라는 군사기지가 최초로 세워진 완도 옆의 작은 섬 (섬 전체가 요새로 건설됨)

② 완도 : 청해진의 의미가 넓어진 지역

(장도를 앞세워 섬 전체가 해상기지로 발전)

③ 장좌리 : 장도와 가장 가까운 완도의 마을 이름

(장도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추정)

④ 대야리·죽청리 : 청해진의 의미가 더 넓어진지역

(청해진을 지원한 마을로 추정)

<청해진의 유적지>

완도군청이 있는 완도 본섬 동쪽으로 장좌리 앞바다에 전복을 엎어 놓은 듯 둥글넙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18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발굴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여러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둘레에 박아놓았던 것인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사적 308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 신지도, 두륜산 도립공원, 충무공 유적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등이 있다

 

참고자료:프리첼(www.freechal.com)

         엠파스(www.empas.com)

         해양문화연구소 홈페이지

         장보고 홈페이지(www.changpog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