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20010347

 

 

이번 답사 예정지 중의 하나인 용장산성의 답사사전 조사 자료이다. 용장산성은 삼별초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우리는 모두 삼벌초의 항쟁에 대해서 익히 배웠을 것이다.

용장산성은 바로 그 삼별초군이 몽고족에 항거한 마지막 격전지다. 사적 제 126호로 지정된 이곳은 현재 흔적만 남아 있지만 이곳서 최후를 마친 많은 이들의 애국혼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곳의 소재지는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번지이고 면적은 산성 일원(6,026평)일대이다. 시대는 고려시대 때의 유물이다. 이곳은 전쟁을 치룬 아픈 상처가 있는 유적지이다.

고려 원종 11년에 고려의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몽고와 싸우기 위해 쌓았던 성으로 지금은 진도군 용장리에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8,781척이고 높이는 5척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의 조정은 몽고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삼별초군에게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지시했으나 삼별초군은 이에 반대하여 왕족 승하 한 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여 1,000여척의 배로 진도에 내려왔다. 이곳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아 2년간을 버티었으나 끝내 몽고군과 고려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배중손이 전사하자 잔여세력은 김통정의 지휘아래 제주도에서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퇴락하고 군데군데 성터가 남아있을 뿐이며 성내에는 용장사터와 행궁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30리 거리 의신면 사천리 왕무덤재는 승화 후 온이 몽고병에 쫓기다 죽어 그 무덤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기도 하다.

삼별초의 본거지 벽파진 용장산성은 당시 벽파진으로 들어온 삼별초군은 읍이었던 용장에 들어와 용장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궁궐 및 총지휘소로 확장 개축하고 용장 산성을 쌓게 된다. 이어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와 거제도에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관군과의 여러차례 접전에서 승리하여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삼별초가 방심한 틈을 타서 여, 몽연합군은 벽파진을 비롯한 세 지역에서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병력과 무기에서 앞선 연합군의 좌우협공을 감당하지 못한 삼별초군은 결국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한 채 용장산성을 내주고 두부대로 나뉘어 남쪽으로 후퇴를 했다.

그 뒤 삼별초군은 패전하여 퇴각한 남도성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남도성은 진도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30분 가량 남쪽으로 내 려간 진도군 임회면 남도 바닷가에 있다.

남도성은 둘레 610m에 높이가 5m 가량인 작고 아담한 성이지만, 동서남문 등 3개 문을 포함하여 옹성은 7개, 성위에 쌓은 치첩 은 43개가 아직 남아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당시 성안에 있었던 동헌, 객사, 군관청, 진무청, 격량고 등은 아 직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성 앞쪽에는 조선시대에 쌓은 2개의 작고 아름다운 홍교가 남아았다.

남도성은 한때 삼별초가 목숨을 걸고 항전했던 사적이다. 한말 때 남도 만호가 이곳으로 부임해 와서 남긴 부임도에 ‘고려원종 때 삼별초 배중손이 성을 쌓고 대몽항전을 했다’는 글귀가 보인다. 삼별초 이후 남도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왜적을 막기위해 크게 중수하였다.

 

이렇게 역사를 가진 용장산성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용장산성의 퇴락하고 군데군데 상처가 남은 자료의 모습을 보면서 역사의 상처도 볼 수 있을꺼라는 생각을 했다

@참고 자료

http://www.koejeong.es.kr/6-1/학습자료/1-(2)-2-삼별초.htm

http://member.hitel.net/~sackful/yongjang.htm

http://www.npc.or.kr/npc/maga/9806/9806_b04his.html

http://www.comin.com/namdo/n12h05.html

http://www.chindo.chonnam.kr/jindonew/tour/nokjin/yongjan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