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길목 벽파진(碧波津)

 

이조말엽인 1864년에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를 보면 해남의 삼산면(三山面)일부에 삼촌이 있고 이곳은 진도군 땅이라 표기한 대신 진도 섬 안에 있는 벽파진은 해남땅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이 지도를 만든 김정호(金正浩)가 쓴 대동지지란 책을 보면 「벽파진은 고려 때 대진(大津:큰 나루)이라 부르던 곳으로 건너편 해남땅 삼기원에 가는 큰 길목이라 나루를 지키는 진장(津將) 한사람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이곳에는 이 나루의 무사함을 비는 당집이 있었고 해남을 건너기 전에 잠깐 쉬는 벽파정도 있었다.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이 정각에서 읊은 명시들이 있다.

 

   <- (이순신 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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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윤 시> (金莘尹 詩)

 

아득한 마음 그지없는데/ 작은 배가 일렁이며 배회하네

 

비가 나리니 구름이 섬을 가리우고/ 바람이 부니 물이 하늘에 뛰어오른다.

 

안개 먹고 사는 신선을 원했더니/ 견우성 범하는 신선이 되는 것을

 

저기는 어느 나라 어느 고을인고/ 섬밖에 파란 연기 피어 오르네.

 

이같은 기문이 남아 있는 벽파정은 해남 관머리가 남송 과의 무역항으로 쓰이던 시절. 때때로 쉬어가는 곳으로도 쓰인 듯 싶다. 그러나 벽파진이 역사상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정유재란 때다. 1597년 8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열두척 배를 몰고 이곳에 도착해 보름간을 지낸 뒤 해남 어란포에 나타난 왜놈의 선단을 보고 9월 15일 우수영으로 들어가 명량 대첩을 이룬 것이다.

 

물론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올 때도 이 나룻터를 썼을 것이나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몽 연합군의 회유 회담 장소로 쓰인 기록은 있다. 그렇다고 벽파진이 유일한 길목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씨 조선 때 큰 길목과 나루는 녹진(鹿津)이어서 이곳에는 출행 중의 관리들이 자고 가는 원(院)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