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20000383

img9.gif

1.소쇄원의 지리적위치와 뜻

2.소쇄원의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른 구분

3.소쇄원에 담긴 정신

 

담양소쇄원 (潭陽瀟灑園)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별서정원. 사적 제304호. 이 정원은 양산보 (梁山甫)가 은사인 조광조(趙光祖)가 남곤 (南袞)등의 훈구파에게 몰리에 전라남도 능주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하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은거처를 마련한 뒤,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볼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 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으르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 (瀟灑翁)이라 하였다. 이곳은 무등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광주호의 상류에 위치하여 무등산을 정남쪽에 대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까치봉과 정원봉(壯元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동서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또,뒷산과 까치봉 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산기슭에 터를 잡은 소쇄원의 바로앞에는 증암천이 동서방향으로 흘러 광주호에 들어가고 있다.

정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흙으로 새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직선적인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山水園林)이다.

img10.gif

 소쇄원은 기능과 공간의 특색에 따라 애양단구역(愛陽檀區域) .오곡문구역(五曲門區域). 제월당구역(霽月堂區域). 광풍각구역(光風閣區域) 으로 구분할 수있다. 애당단구역은 이원림의 입구임과 동시에 계류쪽의 자연과 첨경시설 (添景施設)을 감상하면서 산책을 즐길수 있는 공간이다. 애양단이란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소쇄원사팔영 瀟灑園四八詠> 가운데 있는 '양단동오 陽檀冬午 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宋時烈)이 붙인 이름이다. 왕대나무숲속에 뚫린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입구 왼편 계류쪽에 약 18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방지가 만들어져 있고 , 과거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홈대를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와 물레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위쪽 옆에는 계류쪽으로 튀어나온 대봉대(待鳳臺)라는 조그마한 축대 위에 삿갓지붕의 작은 모정(茅亭)이 있는데, 이것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특히 5곡문이 있는 애양단 돌담은 멀리 제주도에서 온 일꾼들이 돌을 음양으로 배합하여 쌓아 올렸다고 전해지며, 그 때문에 이 마을을 지석리, 즉 '괸돌' 이라 했다고 한다.

오곡문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 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 1.5m의 크기를 갖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이와 비슷한 기법은 1100년대(숙종연간)의 이실충(李實忠)이 만든 경기도 부천의 척서정(滌暑亭)에서 볼 수있다. 오곡문의 '오곡' 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갈짓자형(之字形)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1755년 (영조 31)에 만들어진 <소쇄원도 瀟灑園圖>에,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월당구역은 오곡문에서 남서방향르로 놓여 있는 직선도로의 위쪽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 공간이다. 제월당앞의 마당은 보통의 농가처럼 비워져 있으며, 오곡문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매대(梅臺)에는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 img11.gif

 

광풍각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 (周敦餌)의 사람됨을 평하여 "흉회쇄락여광풍제월 (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소쇄원 주위로 식영정 독수정, 환벽당, 취가정등의 당시의 정자와 벽서가 밀집해 있으며 이중 식영정(지방기념물1호)은 송강 정철의 대표작인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며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그 이름 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자로 광주호를 내려다 보며 그 운치를 자랑하고 있다.

식영정은 정면2칸 측면2칸으로 정자에는 한칸 반짜리 방과 마루가 있다. 명종15년 (1560) 서하당 김성원이 창건하여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憶齡(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식영정 4선'이라 불리던 임승지를 20군데씩 골라 각각 20수씩의 아름다운 시를 지었는데 이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명종 15년인1560년에 송강 정철이 그 유명한 '성산별곡'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성산별곡'은 식영정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별뫼"의 아름다운 사계절과 이곳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시인 묵객들의 풍류를 노래한 것이다.

식영정 건너편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으로 운치를 자랑한다.

img12.gif

소쇄원의 조경식물로는 소나무. 단풍나무. 버드나무. 참등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복사나무. 살구나무. 벽오동나무. 배롱나무. 회화나무. 치자나무. 사계화나무. 국화 파초. 연꽃. 철쭉. 동백. 난. 측백나무 등이 심어졌다. 이들 가운데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는 국화와 함께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던 것이며, 측백나무는 주나라때 왕자의 기념식수로 쓰이던 나무들로그 풍에 따라 자손이 성공하기를 비는 뜻으로 심어졌다. 현재는 당시에 심어졌던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 측백나무, 배롱나무, 몇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소새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언덕에 복사나무. 배롱나무등을 심어 철따라 꽃을 피우게 하였으며, 광풍각 앞을 흘러내리는 계류와 자연폭포, 그리고 물레방아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시인.묵객. 문사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시들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정원은 경사면의 적절한 노단식 처리라든가 기능적인 공간기획, 대숲속의 오솔길, 지형에 따라 변화있는 담장지붕의 선, 담밑에 뚫린 수문 등 낭만적이고 장식적인 조경으로 원림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더불어 조신시대의 별서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있다.

 소쇄원의 정신: 양산보가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사랑채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霽月堂),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광풍각(光風閣)'이라고 한 것은"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처사공실기>에는 , 양산보가 어렸을 때 계곡에서 놀다가 몰오리가 헤엄치는 대로 따라올라가 되었는데 지금 소쇄원 자리에 이르자 작은 포와 못을 이루며 계곡이 길어지고 주위의 풍광이 너무도 수려하여 거기에서 멱도 감고 이리저리 뛰놀며 언젠가는 여기에 와서 살뜻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는 자손들에게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과 "돌 하나 계곡 한구석 내 손길 내 발자국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하나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옛날 당나라때 이덕유(李德裕)가 평천장(平泉莊)을 만들고 그랬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세월이 흘러 소쇄원의 집들은 낡고 헐러 무지고 게다가 전란 속에 피해를 입어 옛 모습을 잃었지만, 1755년에 이 원림의 구조와 건물배치를 자세히 그린 [소쇄원도]를 목판화로 남겨두어 우리는 그 원모습을 남김없이 목원해 볼 수있게 되었다. 더욱 퇴락해버렸을지언정 그 분위기는 그대로 살아 있어 조선시대 원림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평되며, 그 후손들은 15대째 내려오도록 어사 공의 유언대로 남에게 팔지 않았다.

img13.gif

 기대승(奇大升), 송순, 정철 백광훈 고경명(高敬命), 김인후 (金璘厚) 등 당대의 명유(名儒) 명문 (名文), 명류(名流)라 하여 그들이 모두 소쇄원을 찬양한 시를 남긴 이들로써 소쇄원의 성가가 얼마나 높았는갈ㄹ 증명 할 수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대의 명문장가들도 소쇄원에 대한 숨낳은 찬시를 지었지만 어느 것 한편도 그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특히 양산보와 사돈간이었던 김인후는 소쇄원을 48가지로 노래하고도 모자라 10편의 시를 또 지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꿈에 소쇄원을 노닐다] 라는 시를 지은바 있던 고경명이 1573년에 쓴 [소쇄원술기(述記)]를 써 아름다움을 읊고 있다.

 

 

참고자료: (서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두산 세계대백과 사전

(Internet Site) 다음커뮤니케이션

알타비스타

엠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