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부 20010366 양월운

문 화 재 :  문화재명                  지정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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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12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국보 제35호

            화엄사 각황전             국보 제67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제301호

            화엄사 동,서 5층석탑      보물 제132호,133호

            화엄사 대웅전             보물 제299호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제300호

            화엄사석경                보물 제1040호  

            화엄사의 올벚나무         천연기념물 제38호

            화엄사 보제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화엄사 구층암 석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대장경」에 이르기를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이요 또한 곤륜산(崑崙山)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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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 목왕(穆王) 31년은 기원전 991년이다. 이 해에 부처님은 수미산에 있는 도리천( 利天)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달동안 설법을 했다. 이때 인도 우전왕이 불상을 만들려고 하자 목건련이 32명의 장인을 거느리고 도리천에 올라가 부처님의 상호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관찰하고 실제의 모습과 크기가 똑같은 최초의 불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삼국유사」에는 도리천이 신라의 낭산(狼山)에 있다고 하였으며「화엄사 사적」에는 도리천이 화엄사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우전왕이 만든 최초의 불상이 부처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모셔지고 절이 창건되었는데 이것을 화엄사 최초의 창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 5년(544) 연기조사가 흥륜사(興輪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흥륜사는 이차돈의 순교로 인하여 신라 조정에 불교가 받아 들여지면서 법흥왕 때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에 이르러 낙성되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국왕의 몸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해동고승전」에는 법흥왕은 법호를 법공(法空)이라 하였고 진흥왕은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신라의 고승으로 소개되고 있다.

 

 화엄사 창건주 연기조사는 법흥왕 때에 신라 조정에 불법을 전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을 말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인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을 두루 통달하여 이곳 화엄사에서 3천명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양성하여 해동에 유통시켰다.

이것이 신라에 대승불교가 유통된 시초이며 연기조사를 해동 화엄종의 비조(鼻祖)로 추앙한다.

 

 현재는 화엄사로 불리어지고 있으나 화엄사의 전성기인 신라 경덕왕 때에는 화엄사 골짜기에 흥륜사(興輪寺) 황룡사(黃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망덕사(望德寺) 청량사(淸凉寺)를 포함하여 8寺 81庵이 있었다.  이를 통칭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화엄법운사(華嚴法雲寺)라고 한다. 현재의 화엄사는 신라 황룡사를 복원한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자장법사가 화엄사에 구층탑과 4사자 3층석탑을 세우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원효대사가 화엄사 해회당(海會堂)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신라 문무왕 때에 의상대사가 이곳을 화엄10찰의 종찰(宗刹)로 삼아 전교하였으며 지금 각황전 자리에 2층 석조 법당을 세우고 사방 벽에 「80화엄경」을 새겼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치고 삼국통일의 대업이 성취될 무렵 이번에는 당나라가 신라마저 정벌하려고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화엄사에 임시로 단을 설치하고 문두루 비밀법을 써서 돌풍을 일으켜 당나라 전선을 모두 침몰          ◎서오층석탑          시켜 격퇴하였다. 후에 단을 설치하고 기도했던 곳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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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13년(754) 8월 1일부터 왕은 황룡사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일으켰는데 이때 大德 法海에게 청하여「華嚴經」을 講하게 하고 아울러 현재 국보 169호로 지정된 백지묵서화엄경을 베껴 쓰고 황룡사 종을 주조하였으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에는 8寺 81암자가 있었다.

 신라 말기의 도선국사는 신라 문성왕 4년(842) 15세 되던 해 이곳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으며 화엄사를 크게 중창하고 고려의 창업을 도왔다.

 

 신라 49대 헌강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비 권씨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어 법호를 수원(秀圓)이라고 하였는데 재물을 희사하여 화엄사에 31間의 강당인 광학장(光學藏)을 세우고 대를 이어 즉위한 정강대왕은 형인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왕을 비롯한 왕실의 친척과 조정의 대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화엄사에서 화엄경사(華嚴經社)를 결성하고 대덕 현준법사(賢俊法師)를 초청하여 광학장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고 아울러 명필로 하여금 화엄경을 필사(筆寫)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매년 두 번씩 화엄사 광학장에 모여 「80권화엄경」을 전독(轉讀 뜻을 새기며 읽는 것) 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신라 말기의 대 문호인 고운 최치원은 중국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귀국하여 화엄사에 머물며 정강왕이 결성한 화엄경회에 참여하여 이 모임을 결성한 축원문을 지었고 아울러 화엄사와 관련된 많은 문집을 남기고 있는데 현재 화엄사 사적기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 9년(935) 겨울 10월에 신라의 국력은 약해지고 형세가 위태로와져 스스로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자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김봉휴(金封休)에게 國書를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리고 막내 왕자는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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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운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는 원래 지리산의 산신이라고 하며 고려의 창업을 도왔던 도선국사가 출가한 곳이 이곳 화엄사이기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 화엄사에 대한 배려는 각별하였다.

 

 고려 문종(文宗)의 왕자였던 대각국사 의천이 한때 화엄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문종은 전라남북도 경상남도의 3道에서 화엄사에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때에 승군을 조직하여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는 21세 되던 해 당시 화엄사에서 법석(法席)을 열고 있던 부용선사(芙蓉禪師)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벽암대사가 왕명을 받들고 1630년부터 1636년까지 7년에 걸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조 숙종(肅宗) 29년(1702) 각황전의 중건과 함께 조정에서 화엄사를 한국 불교의 총 본산인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가람으로 승격하였다.  

 

 

 

 

       ◎각황전앞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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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覺皇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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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며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한다. 장육금신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16척(尺)의 키에 황금색 피부를 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부처님 생존시에 부처님의 몸과 똑같은 모습과 크기로 만든 불상을 장육존상(丈六尊像)이라고 하는데 현재 모셔진 불상 역시 장육존상이다.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며 화엄사의 중심 법당이다.신라 3보(三寶 )중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은 인도 아육왕이 바다에 띄워보낸 구리와 금으로 진흥왕 35년 서기 574년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여 장육전을 처음으로 건립하고 모셨는데 당시는 입상(立像)이었다. 그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佛殿, 장육전)을 무너뜨렸다. 이때에 의                  ◎각황전                  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각황전 자리에 2층 석조(石造) 장육전을 건립하고 법당의 4면 벽에「80권 화엄경」을 새겼다. 고려 몽고병란 때에 황룡사 장육전과 구층탑이 화재를 당했는데 구층탑은 다시 복원되지 못하였다. 황룡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중의 하나는 중심법당인 장육전이 이미 진흥왕 35년에 건립되었는데 10여년 후인 진평왕 6년(584)에 금당(金堂, 대웅전)이 조성되었다고 했다. 현재의 화엄사 가람배치 역시 중심법당인 각황전이 있는데도 대웅전이 별도로 있다. 어느 절이나 중심법당의 앞에 석등이 세워진다. 사적기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구층탑이 장육전 아래 현재 5층석탑이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각황전을 세운 것이다.

장육전 석벽에 새겨진 「화엄경」을 화엄석경이라고 하는데 부서진 조각들이 화엄사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각황전은 이조 숙종때에 계파선사(桂波禪師)에 의해 조선 왕실의 시주로 건립된 것으로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동왕 27년 (1701)년에 상냥되었고 이듬해인 1702년에 모든 장엄이 끝나 낙성되었다. 지금 모셔진 3여래 4보살상은 1703년에 조성된 것이다. 각황전을 중건할 때 지은 상냥문에 의하면 각황전은 숙종의 네째 왕자인 금(昑)과 왕자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수명장수를 위하여 시주한 원당(願堂)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21대 영조(英祖)인데 5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석가세존의 부도

 화엄사 각황전 뒤로 108계단을 오르면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73과와 유골이 함께 봉안된 석가여래의 부도(浮屠)가 있다. 이 부도에 관해 만우(曼宇)스님이 집록한「화엄사 사적」에는 신라 선덕여왕 14년 을사(乙巳, 645)년 자장율사가 당에서 돌아와 다음에 세운 화엄사 사리탑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탑의 모양을 따라 4사자 3층석탑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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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가 전래된 사실을 살펴보면 최초에는 신라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梁)나라에서 사신 심호(沈湖)와 그곳으로 유학간 신라의 중 각덕(覺德)을 보내어 부처님의 사리 약간을 보내왔으므로 왕이 모든 관리들에게 흥륜사(興輪寺)의 앞 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했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직접 준 석가모니의 사리 100과(顆)와 불두골(佛頭骨) 불지절(佛指節) 그리고 부처님이 직접 입었던 가사(袈裟) 한 벌을 황룡사 구층탑과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태화사(太和寺) 탑 등 세 곳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또한 황룡사 구층탑은 이미 고려 몽고병란 때에 소실되어 복원되지 못하였고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 4과(顆)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태화사 탑은 현재 어느 절에 있는 사리탑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태화사는 자장법사가 중국의 태화못(太和池) 가를 지날 때에 서해의 용왕이 신인(神人)으로 나타나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일을 설명하고 아울러 석가모니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할 부도(浮屠)를 세우고 그곳에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달라' 는 부탁에 따라 세워진 절이다.

 판본 [화엄사 사적]의 자장전에는 대사는 환국하여 문수보살이 범승으로 화신하여 일러준 말과 서해의 용왕이 부탁하던 말들을 모두 왕에게 아뢰었다.        ◎4사자3층석탑         이에 왕은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그 말대로 황룡사를 중창하고 구층탑을 세워 사리를 모시고 다음으로 월정사 태화사를 창건하고 겸하여 화엄사에 부탁하여 사리를 모시도록 했다.

그런 뒤에 취서산 아래 독룡(毒龍)의 신지(神池)에 가서 설법하고 계를 주어 악한 마음을 조복하여 연못을 메워 단을 축조하여 사리와 골절 가사 경등을 안치하였는데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했다.

고 하였고 아울러 앞서 자장이 당에 들어가 원향선사를 작별하고 돌아와서 화엄사와 황룡사 월정사의 모든 가람을 일시에 같이 중건하였다. 고 하여 화엄사 사리탑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직후에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서산대사가 지은 '석가세존의 금골사리 부도비'의 비명(碑名)에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오직 영남 통도사(通度寺)의 신승(神僧) 자장(慈藏)이 옛적에 봉안(奉安)한 석가 세존의 금골사리  부도가 자못 신기한 영험이 많아, 마침내 천문(千門)으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였고. 또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과연 세상의 거룩한 보배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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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불행히 만력(萬曆) 20년(1592)에 이르러 일본 해병이 우리나라 남방에 들어와 헐고 불살라 억조(億兆)의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될 때 그 화가 부도에 미쳐와 그 보배를 잃을 뻔하여 몹시 고민하고 답답해할 즈음에 마침 승군(僧軍)대장 유정(惟政.사명대사)이 군사 수 천명을 거느리고 마음을 다해 수호(守護)한 힘을 입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정은 후환이 없을 수 없다 하여 금골사리 두 함을 몰래 이 병로(病老)에게 주면서 금강산에 봉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이 병로는 감격하여 그것을 받아 봉안하려다가 다시 가만히 생각하였다.  금강산은 수로(水路)에 가까우므로 뒷날 반드시 이런 화가 있을 것이니 금강산에 봉안하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전날 그 해병들이 부도를 해친 것은 금보(金寶)를 가지고자 함이요, 사리에 있지 않으므로 금보만 취하면 사리는 흙과 같이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옛터를 수리하여 거기에 봉안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나는 곧 한 함을 유정에게 돌려 주었다.  유정은 그 계책을 그럴 듯하다 생각하고 함을 받아 곧 옛터로 돌아가 석종(石鍾)에 넣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한 함은 이 병로(病老)가 받들고 삼가 태백산에 들어가 부도를 창건(創建)하려 하였으니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제자 지정(智正)과 법란(法蘭)무리들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석종에 봉안하라 하였다.  두 선자는 지성으로 널리 모금하여 몇 달이 못되어 부도를 만들고 봉안하였다.  그 아름다운 공덕에 대해서는 연화경(蓮華經)의 수량품(壽量品)가운데 이미 널리 적혀 있으니 내가 또 무슨 군말을 하겠는가.

 또한 우리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고 제후(諸侯)도 줄지어 있지 않았다.  신인(神人) 단군(檀君)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밑에서 출생하여 일어나 시조(始祖) 왕이 되매, 중국 요임금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태백산은 태백산이 처음으로 한 나라의 왕을 낳아 조선 국민으로 하여금 동방 오랑캐라는 이름을 아주 벗게 하였고, 마침내 삼계(三界)의 스승을 봉안하여 또 동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처가 될 인(因)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산의 신령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위대하여라, 이것은 한갓 산만 중한 것이 아니라 나라도 또한 중하며 한갓 나라만 중한 것이 아니라 사람도 또한 중한 것이라, 그 품질(品帙)을 말한다면 유정선자(惟政禪子)는 자장법사 보다 못하지 않고, 태백산은 영취산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다. 이튿날 지정과 법란의 두 선자가 부도를 낙성하는 큰 재(齋)를 베풀었다

고 하여 임진왜란 때에 사리 유통 경로를 자세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근래에 와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이조 5백년을 대표할만한 신승(神僧) 서산대사가 고조선의 도읍지인 신시(神市)와 단군에 관해 정식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자장법사가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와 유골이 함께 모셔진 부도가 있는 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나라를 열었던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있는 神市 라는 말이다.  또한 단군의 출생에 관해서도 '태백산이 처음으로 한 나라의 왕을 낳아(太白始胎一國王)'라고 하여 지리산 산신인 선도성모(仙桃聖母)가 중국 제실의 공주로 환생하여 해동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아 신라를 건국하였고 중국의 사신 왕양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선도성모에게 제사한 제문에 '현인을 낳아 나라를 세운다(娠賢肇邦)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 통도사에 모셔진 사리에 관하여 사명대사가 지은 '만력 계묘 중수기(萬曆癸卯重修記)'에 의하면 만력(萬曆) 21년(1593)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는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다행히 동래사인(東萊士人) 옥백거사(玉白居士)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이를 온전히 되찾아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만력 31년(1603) 경잠(敬岑)에게 명하여 황폐화된 계단을 중수하고 다시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는데 이 일은 의령대사(儀靈大師)가 화주(化主)가 되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가져온 금골사리 두 함은 통도사에 모셔진 사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현재 화엄사에 있는 사리탑에 관해 1882년 벽암대사의 문도인 경원(警圓)스님이 지은 '탑전 중수기(塔殿重修記)'에 의하면 '자장법사가 가져온 사리 100과 중에 73과와 성골(聖骨)이 함께 봉안된 신령스런 탑으로 해마다 수 차례 방광(放光)을 하는데 칠흑과 같이 어두운 밤중에도 밝기가 밝은 달이 뜬것과 같다'고 한다.  

이것은 [화엄사 사적]과 구례읍지 등에 기재된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또 지난 1995년 8월 18일 화엄사 서오층석탑을 해체하다가 영롱한 부처님의 사리 22과와 유골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사리가 언제 어떤 경로에 의해 이 탑에 모셔지게 되었는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가져온 사리 두 함은 원래 현재 국보 35호로 지정된 화엄사 사리탑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번에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22과는 서산대사가 사리 두 함 중에 한 함을 임진왜란 이 후에 새로 탑을 만들어 봉안했던 탑으로 추정된다.

화엄사 대웅전 아래에 동서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지난 1999년 10월에 또 동오층석탑을 해체 하였을 때에 탑의 기단부에서 임진왜란 때에 부서진 화엄석경(華嚴石經)조각들이 다량 내장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이 탑이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탑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탑을 살펴보면 위로 3층이 있고 그 아래 중앙에 어머니像이 동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서 있고 주위에는 표정을 달리한 네 마리의 사자像이 어머니를 호위하면서 네 귀퉁이에 앉아 어머니와 함께 탑을 머리로 받치고 있다.

머리에 이고 있는 바로 윗칸에 石門이 조각되어 있고 신장이 그 문을 지키고 있는데 부처님의 사리와 유골은 이곳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발 아래 기단의 아래에는 선녀像이 양각되어 있는데 天衣를 휘날리며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탑의 동쪽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아들탑이 있는데 아들이 부모님을 향해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차(茶)를 공양하는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석등을 이고 있다.

이 탑을 효대(孝坮)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孝는 사바세계를 하나의 큰 가정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며 효도라는 말은 부모와 자식이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가운데 서 계신 어머니는 우리의 국토를 상징한 것으로 삼신산(三神山)이며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삼신할머니 이다.

그리고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부처님의 사리와 유골은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에게서 받아 가져온 것으로 석가모니의 유물인데 부처님이 모든 중생들의 아버지임을 뜻하는 것이다.

 어머니 주위의 네 마리 사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네 강대국을 상징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특수성과 네 나라를 맹수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앞의 아들탑은 하늘을 아버지로 삼신산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세계의 모든 인류를 상징한다. 자식이 부모의 성품을 그대로 닮듯이 성모의 품속에서 살고 있는 한민족은 삼신할머니의 품에서 자비를 배우고 지리산 산신인 마야부인 품에서 도를 터득하여 세계라는 큰 가정에서 어머니(보살)의 역할을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는 민족이다.  이제 우리 국토에 감추어진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한민족이 세계라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올바로하게 되면 주변의 강대국들은 부모님의 국토를 호위하게 되며 해외의 백성들은 모두가 철이 들어 부모님이 계시는 국토에 스스로 찾아와 부모님의 나라에 특산물을 조공하게 된다.

이 때에 비로소 세계가 한 가족이 되어 모든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국토를 열리는 것이고 부모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기에 그 길만이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르침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탑을 두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이고 서 있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세속에서 이르기를 (창건주) 연기(煙氣)와 그의 어머니가 화신(化身)하신 곳이라고 한다.'(有石像 戴母而立 俗云 煙氣與其母 化身之地)라고 하였다.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주(周)나라 목왕(穆王) 31년 경인(庚寅 BC991)년에 화엄사에 있는 도리천( 利天)에서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달동안 설법하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화엄사가 창건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때 마야부인이 화신(化身)하여 설법을 들었다. 이것이 와전(訛傳)되어 여기에 아들탑이 창건주 연기조사이며 이 탑이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위하여 세운 탑, 혹은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탑이라고 하며 잘못 소개되고 있다.

 

          사바교주(裟婆敎主)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금골 사리(金骨舍利) 부도비(浮圖碑) 비명(碑銘)  

 

         휴 정(休靜,서산대사)지음

 

 삼가 생각하오면 우리 현겁(賢劫)의 거룩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바로 천축국(天竺國)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서 지나간 세상에 도를 이루시고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체득(體得)하신 지 오래이다.

결(訣)에 말하기를 석가(釋迦)는 성(姓)이니 이것은 능인(能仁)이라 하는데 자비(慈悲)로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모니(牟尼)는 자(字)이니 이것은 적묵(寂默)이라 하는데 지혜가 이의(理議)에 맞는다는 뜻이다. 자비와 지혜를 아울러 활용하기 때문에 생사(生死)에도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로지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기 때문에 물에 비치는 달과 같은 응신(應身)을 시방(十方)세계에 나타내어 겁(劫)이 다하도록 중생을 구제하시되 싫증이 없으셨다. 이미 그 지위가 보처(補處)에 올라 도솔천(兜率天)에 나시어 이름을 호명대사(護明大士)라 하고 한창 하늘 무리들을 구제하고 계셨다.

보요경(普耀經)에 말하기를 석가가 도솔천에서 왕궁(王宮)에 내려와, 몸으로 광명을 놓으면서 발로 연꽃을 밟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獅子처럼 외쳐 세 가지 방편을 보이셨다고 하였는데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년(甲寅年)이었다.

태자의 이름은 실달(悉達)이니 이것은 길(吉)이라는 뜻이다. 문무(文武)에 능하고 음양(陰陽)을 잘 알아서 인간이나 천상의 모든 일을 배우지 않고도 낱낱이 저절로 알았으므로 부왕(父王)은 매우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는 날을 칠일 뒤로 정하였다.

어느 날 태자는 사대문(四大門)밖에 나가 놀다가 기쁘고 슬픈 일들을 보고 출가(出家)할 마음을 내었다. 부왕이 듣고 놀라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호위하게하여 출입을 일체 금하고 오직 정거천인(淨居天人)만 통하게 하였다. 하룻밤에 성을 넘어 집을 나가니 태자의 나이는 19세였다.

처음에 단특산(檀特山)에서 들어갔다가, 세 가지 선정(禪定)을 버리고 드디어 상두산(象頭山)에 들어가 6년 동안 앉아 고행(苦行)하다가 새벽의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닫고 천인사(天人師)라 이름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30이었다.

그리하여 녹야원(鹿野苑)에서 교진여( 陳如) 등 다섯 사람을 위하여 도과(道果)를 논하시고 이내 49년 동안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미묘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대가섭(大迦葉)에게 부촉(付囑)하시고 다시 아난(阿難) 시자(侍者)에게 분부하여 법을 전하고 교화하는 것을 끊이지 않게 하시면서 각각 법의 게송(偈頌)을 전하셨다.

그 뒤에 구시라국(拘尸羅國) 희련성(熙蓮城)의 쌍수(雙樹) 밑에서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개고 고요히 열반에 드셨는데 다시 관(棺)에서 일어나 그 어머님을 위해 설법하시고 이내 무상게(無常偈)를 읊으셨다.

 

모든 행은 무상(無常)하나니

이것이 나고 사라지는 법이다.

나고 사라짐마저 사라진 뒤에는

적멸(寂滅)하나니 이가 곧 즐거움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조금 뒤에 금관(金棺)이 자리에서 떠오르면서 삼매(三昧)의 불로 그 몸을 사르니, 사리가 공중에서 비와 같이 쏟아져 여덟 섬 네 말이나 되었으니, 목왕(穆王) 53년 임신년이었다.

아아, 지금도 부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중생의 감동(感動)이 있으면 만 가지 덕의 몸으로 응해 주시고 감동이 없으면 삼매에 들어있을 뿐이요, 가고 오는 것에 관계가 없으시다.

 처음에 이 세상에 강생(降生)하시고, 집을 떠나시고, 도를 이루시고, 법을 설하심은 늙은 할머니가 나뭇잎을 가지고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것과 같고, 그 뒤에 꽃을 들고 자리를

나누고 열반에 들고 발등을 보이심은 늙은 아버지가 미친 아들을 다스린 것이요, 의사가 약을 두고 타향으로 떠난 것과 같다.  그때의 사리(舍利)는 그 회상에 있는 보살·연각(緣覺)의

성스러운 제자들과 또 사람과 하늘의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이 각각 나누어 티끌 같은 여러 세계에 흩어, 탑을 세우고 석종을 만들어 공양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없는 국토의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으니, 저 사위국 3억의 집과 중국의 한 모퉁이가 바로 그렇다.  다만 중국에 있어서는 그 뒤로 천년을 지나 후한(後漢)의 영평(永平) 8년에

임금이 꿈을 꾸고 신하를 시켜 그 교법을 전해 받았을 뿐이요,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영남 통도사(通度寺)의 신승(神僧) 자장(慈藏)이 옛적에 봉안(奉安)한 석가 세존의 금골사리 부도가 자못

 신기한 영험이 많아, 마침내 천문(千門)으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였고. 또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과연 세상의 거룩한 보배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행히 만력(萬曆) 20년(1592)에 이르러 일본 해병이 우리나라 남방에 들어와 헐고 불살라 억조(億兆)의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될 때 그 화가 부도에 미쳐와 그 보배를 잃을 뻔하여

 몹시 고민하고 답답해할 즈음에 마침 승군(僧軍)대장 유정(惟政.사명대사)이 군사 수 천명을 거느리고 마음을 다해 수호(守護)한 힘을 입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정은 후환이 없을 수 없다

 하여 금골사리 두 함을 몰래 이 병로(病老)에게 주면서 금강산에 봉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이 병로는 감격하여 그것을 받아 봉안하려다가 다시 가만히 생각하였다.  금강산은 수로(水路)에

 가까우므로 뒷날 반드시 이런 화가 있을 것이니 금강산에 봉안하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전날 그 해병들이 부도를 해친 것은 금보(金寶)를 가지고자 함이요, 사리에 있지 않으므로 금보만 취하면

사리는 흙과 같이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옛터를 수리하여 거기에 봉안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나는 곧 한 함을 유정에게 돌려 주었다.  유정은 그 계책을 그럴 듯하다 생각하고 함을 받아 곧 옛터로

 돌아가 석종(石鍾)에 넣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한 함은 이 병로(病老)가 받들고 삼가 태백산에 들어가 부도를 창건(創建)하려 하였으니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제자 지정(智正)과 법란(法蘭)

무리들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석종에 봉안하라 하였다.  두 선자는 지성으로 널리 모금하여 몇 달이 못되어 부도를 만들고 봉안하였다.  그 아름다운 공덕에 대해서는 연화경(蓮華經)의 수량품(壽量品)가운데

 이미 널리 적혀 있으니 내가 또 무슨 군말을 하겠는가.

  또한 우리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고 제후(諸侯)도 줄지어 있지 않았다.  신인(神人) 단군(檀君)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밑에서 출생하여 일어나 시조(始祖) 왕이 되매, 중국 요임금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태백산은 태백산이 처음으로 한 나라의 왕을 낳아 조선 국민으로 하여금 동방 오랑캐라는 이름을 아주 벗게 하였고, 마침내 삼계(三界)의 스승을 봉안하여 또 동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처가 될

 인(因)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산의 신령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위대하여라, 이것은 한갓 산만 중한 것이 아니라 나라도 또한 중하며 한갓 나라만 중한 것이 아니라 사람도 또한 중한 것이라, 그 품질(品帙)을

 말한다면 유정선자(惟政禪子)는 자장법사 보다 못하지 않고, 태백산은 영취산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다. 이튿날 지정과 법란의 두 선자가 부도를 낙성하는 큰 재(齋)를 베풀었다.

이 병로(病老,서산대사)는 자리에 올라가 그 법석(法席)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이 모임에 과연 어떤 장부로서 세존께서 탑묘(塔廟)속에 들어가시지 않은 줄을 아는 이가 있는가.  만일 부처님이 탑묘 속에 드시지 않은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이 견고한 법신을 물었을 때 조사는 산의 꽃과 시내의 물이라고 대답하였다.  오늘 이 병로는 탄식하며 꽃을 들고 말하노니 청컨대 대중들은 이리 와서 세존께 예배하라.  만일 석가의 진신(眞身)을 말하면 그것은 지극히

고요하되 지극히 묘하며, 지극히 크되 지극히 작으며, 함이 없기도 하되 하지 않음도 없다.  백억의 성스러운 대중의 찬탄은 허공을 헤아리는 것 같고 팔만 악마의 무리들의 훼방은 바람을 잡아 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늘의 이 모임 가운데 이익도 손해도 있다는 것을 과연 아는 이가 있는가.  믿는 사람은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반드시 즐거움의 언덕에 오를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법을 비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바다에

 떨어질 것이니, 마치 유교 경전에 이른바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아아, 각각 빛을 돌려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라.

  옛날 공부자(孔夫子)가 상태재(商太宰)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서방의 큰 성인은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으므로 넓고도 넓어 배성으로는 능히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과연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알수

 있다고 말할 만한 것이다.

  휴정은 지금 나이 84세로서 정신은 황홀하고 눈은 어두우며 손은 떨리면서 다른 사람의 간청에 얽매여 글을 짓고 돌에 글씨를 쓰지마는 글과 글자가 모두 거칠어 후인의 꾸짖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황송하고 부끄럽다.  오직

바라노니 통달한군자(君子)는 다행히 용서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