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원20010417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보배로운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보통외적인 부귀영화를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이 그것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세상과는 다른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 세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이렇게 세가지가 불교에서 중심적인 세가지 요소인데요. 이에 따른 삼보 사찰이 있습니다. 양산의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보관되어 있어서 불보사찰이구요. 합천의 해인사는요.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어서 법보사찰이라 불리웁니다.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가 마지막 사찰인데요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이라 불리웁니다.승맥을이었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를 들수 있는데요 첫 번째 송광사는 고려때 보조국사지눌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 잡아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그 근본도량이 송광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이유는 지눌스님의 뒤를 이어 15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16명의 국사가 나와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송광사는 불교전통의 산실이며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중요한 사찰의 의미를 띄게 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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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이글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는 눈치를 채셨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송광사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지눌스님의 삶과 정혜결사운동의 내용과 정신을 간단히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눌스님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비석에는 호랑이눈 소걸음이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호랑이는 사물을 쳐다볼 때 곁눈질하거나 흘겨보지 않고  몸전체를 돌려정면으로 쏘아봅니다. 직시를 통해 바른 판단을 하고 내가 선 자리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엇을 할까하는 목표의 정립을 세우시면서 삶을 살아오신것입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은 서두르지 않고 게으름 부리지않는 소처럼 목표를 향해 정진해 나가는 실천의 모습을 묘사한것입니다.

지눌스님은 고려의종 12년 (1158)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몸이 약한 지눌스님을 위해 어머님이 병을 낫게 해주면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마음을 빌자 몸은 나았고 어렸을때 출가를 하였습니다. 12세기 고려불교는 타라의 끝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것을 본 지눌 스님은 정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의 결과물이 정혜결사운동인 것 입니다.선과교의 일치점을 찾기위해 노력하던 스님은 화엄경에서 찾아내고 33세때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마땅한 터를 찾던중 길상사를 알게되고 정혜결사를 그곳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송광산 길상사는 조계산 송광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스님은 생을 마칠때까지 정혜결사운동의 완성을 위해 소걸음의 실천으로 일관하셨습니다.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정혜결사의 정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님은 불교가 타락하게 된 것은 마음닦는것(=결사)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불교가 타락하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사의 기본을 이렇게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결사의 기본 자세는 첫쨰로 내 마음이 곧 부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안에서 부처를 찾아라 바깓에서 찾으려 하지말고 자기마음안에서 부처를 찾으라는 이야기지요 두 번째 체험을 통해 마음을 =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깨우치는것을 강조하셨습니다.세번째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닦고 생활의 질서인 바른자세를 갖추기를 바라셨습니다.계율의 실천 또한게을리하지말라고 하셨죠. 네번째는 마음닦는일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한다는 마음자세를 가져라. 그리고 다섯째 불교안의 다양한 흐름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회통적 전통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마지막 결사운동을 행할때 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존중하여 맞춤 공부를 실행하셨습니다.돌아가시기전에 내가 이세상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는것도 오래지 않을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각자 노력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마지막 진리의 대담에서 최초로 한 제자가 스님의 병한이 저 유마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라고 묻자 이에 스님꺼선 들고 계시던 육환장으로 법상을 쾅쾅하고 두어번 내리치신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앉으신채 조용히 열반에 이르셨습니다.(1210년3월27일) 범세계적으로 보조 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있습니다.범세계적으로도 보조 사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1983년 스님의 어록이 하와이 대학에서 영문으로 번역출간 되었고 스님의 사상을 주제로 한 논문 만도 5편에나 제작 되었습니다.이땅에 스님같은 선인이 계셨다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할것입니다.본격적으로 송광사에 대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라남도 승주군 송관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사찰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며, 대길상사 수선사라고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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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입니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18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소나무'송'자를 '18공'이라고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광포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국사전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하여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라고 풀었습니다. 김영수는 이 산에 '솔갱이'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던 것이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승려 임석진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역사]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와 <보조국사비명> 및 <승평속지>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치징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사찰이었습니다. 그 뒤 고려 인종때의 석조가 중창하려는 원을 세우고 역부를 소집하고 임목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습니다. 50여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를 옮겨옴으로써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습니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 개성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수행결사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맹문을 지어 정혜결사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중의 한 사람인 득재가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습니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라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이 송관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1210년에 보조국사가 입자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은 왕명에 의하여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고, 그때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고봉은 1395년 불, 법, 승의 전당을 중건하였고, 정종은 수륙사를 중창하도록 윤지를 내렸습니다. 1420년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위하여 정종때에 설립되었던 수록사를 철폐하고 선종으로 복귀시키는 행정 적인 절차도 밟았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 임경당, 보조암, 천자암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떠나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 때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에 응선은 수각과 천자암과 보조암, 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를 모셨습니다. 부휴는 제자 4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과 동행랑,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습니다. 그 뒤 600여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1842년 3월 2일 낙하당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 5개소, 승료 8옥, 공사 12 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사, 경판 및 외향각의 유조,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습니다. 이듬해 기봉과 용운은 대웅전, 명부전, 응향각, 법왕문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는데, 1856년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1290냥에 달하였습니다. 그 뒤 율암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 장탄문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습니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사변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사찰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고, 공비들은 사찰에 대한 알략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사찰의 중심부를 불태웠습니다. 1955년에서 1961년 사이에 취봉과 금당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이 설법전, 수선사, 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을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1983년부터 주지 현호가 대웅보전, 지장전, 승보전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람배치 및 당우]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동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재건된 건물을 합하면 약 50여동의 대사찰로서 그 사격을 유지하고 이싿.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사변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합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 해청당, 행해당, 임경당, 도성당입니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동구에서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청량각, 일주문 :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흥교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습니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있습니다. 다포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입니다.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여 있어 특이합니다.   척주각, 세월각, 우화각 :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채 있는데, 현관 척주각, 세월각이라 하였습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입니다. 죽은이의 위패를 모시는 고으로, 재식시 영가의 관욕처가 된다고 합니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됩니다. 영가각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가 있습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지나는 곳에 능허교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 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많이 걸려있습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 법왕문 :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습니다. 천왕문은 1609년에 초창하여 1718년에 중수하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나 1806년에 다시 사천황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습니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황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합니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이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의 신문, 잡지, 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소개 전에 이곳에서 꺼내어온 것이라 합니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두었고, 가사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버렸습니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 운판, 목어, 홍고 등 불전사물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다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웅전, 설법전, 수선사 : 대웅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입니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뒤 1961년에 주지 금당이 중창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을 1구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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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83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 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습니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의 건물들로서 설법전, 수선사 등이 있습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배치입니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름니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원경만 있습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현재 외국인 승려 여러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입니다.   상사당, 하사당, 응진전 :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 하사당, 향적전, 응진전, 성수전, 산신각, 진여문, 정운당, 백운당, 설법전, 차안당, 조사당, 국사전, 진영당 등이 있습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상요되었습니다. 하사당은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특수한 건물입니다.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며면한 1623년의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입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는 1724년 화승 의겸이 그린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에,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습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조전의 화목을 적재해 두는 향적전이 있습니다.   국사전, 진영각 :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입니다. 송광사와 더불에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입니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입니다. 현재 이건물은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안에는 주로 풍암의 만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약사전, 영산전 :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입니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여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영산전은 보물 제 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은 의겸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습니다.   관음전, 명부전, 화엄전 :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습니다. 높이 250cm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불일보조국사감로'라고 쓴 오세창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명부전은 유명계의 시왕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합니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합니다. 1641년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 월조헌이 있습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유물 및 사간장경]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 42호인 목조삼존불감을 비롯하여 국보 제 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노비첩과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 134호인 경질과 보물 제 175인 금동요령 등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는 제 18호인 자정국사사리함, 제 19호인 능경난사, 제22호인 송광사금강저, 제28호인 고봉국사주자원불, 제 30호인 팔사파문자 등이 있습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 않는 신비성이 있다. [부속암자]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암자들은 폐허가 된 채 유지만 남아 있거나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생태에 있습니다. 현재 수행승이 거처하고 있는 암자는 천자암, 부도암, 감로암, 불일암뿐입니다. 이밖에도 유지만 밝혀진 암자로는 광원암, 청진암, 목우암, 실상암, 판와암, 상선암, 자정암 등이 있고, 보조암, 은적암, 조계암, 묘적암 등은 이름만이 전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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