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답사를 되돌아보며

                                '98 한상훈

 

  우리 사학과에서는 졸업하기 전까지 4번의 답사를 다녀와야 한다. 이 4번이란 기회가 우리에게 때론 유용하게 아니면 단순한 여행에 지나지 않게도 되는 것은 다 개인의 문제라고 본다. 여행의 즐거움을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이건 여행이 아닌 답사라는 것을 유념했으면 한다.

  답사란 쉽게 말해 옛 선조들이 남긴 자취를 되집어 따라가 보는 것이라 하겠다. 한 마디로 우리 선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했고 또 무엇을 남겼는지 조금이나마 알아보기 위한 현장 학습이다.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소리다. 우리는 이미 3번의 답사를 갔다 왔고 이제 마지막 1번이 남았다. 지금 여기서 지난 3번의 답사중 전남답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전남지역 중  대략 어디어디를 다녀왔는지 소개하고 남은 답사를 준비하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적어도 비싼 돈 내고 갔다온 답사를 어디어디 갔다 왔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모두 다 기억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자 학우 여러분 옛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자.

  작년 1학기 답사는 전남권 즉 남도 답사를 갔다왔었다.

우선 맨 먼저 간 곳이 백양사이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 창건하여 백양사라 하다가 고려 덕종때 정토사라 불렸었다.

  지금의 백양사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이 곳에서 불경을 독경하고 있는데 백양이 그 독경소리를 듣고 그 날밤 선사의 꿈속에서 나타나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축생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며 사라졌다. 이상히 여긴 선사는 다음날 아침 뒷산을 산책하다. 죽어 있는 백양을 보고, 그 꿈을 이해했다. 그 후로 스님의 높은 법력으로 축생인 양을 제도하였다하여 절 이름을 백양사로 고쳐 불렀다. 이 적은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이며 최근 들어 고불 총림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 대웅전 천장에는 별난 볼거리가 있다. 마치 모빌과 같이 대들보에 매달려있는 동물들과 동자들이다. 청룡과 황룡, 학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동자승 불로초를 물고 등에는 나무가 솟아있는 사슴...등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아까운 것들이다.

  백양사를 나와 필암서원을 들러보고 광주 민속 박물관을 거쳐 당도한 곳은 운주사. 운주사는 신라말 도선 스님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남 영암 출신의 도선 스님이 우리 나라를 배모양으로 보고 그 허리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지방 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해 천불 천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만들었다고 하며 그래서 절 이름은 풍수지리상 "떠나는 배"라고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운주사를 다른 절처럼 불전은 별 의미가 없고 곳곳에 널린 불탑과 불상을 보러온다. 그래서 인지 이 만큼 큰 다른 절에는 다 있는 금강문이나 사천왕문릉은 아예 없다. 이 곳 입구에서 왼편 언덕에는 와불과 칠성 바위가 있다. 와불은 원래 입불로 하려다 미쳐 일으켜 세우지 못한 것이라 한다. 길이 12m의 이 두

 

와불은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레불이라 하며 이 와불과 일어서는 날 세상이 바뀐다고 한다. 이 불상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을 후세 사람에게 부탁하여 생긴 전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우리 부모님들이 당신을 어렵게 살았어도 자식들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좋은 세상은 그냥 얻어지는게 아닌법 나머지는 우리가 다해놨으니 마지막은 너희 힘으로 한번 해 봐라는 깊은 뜻이 서려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인지 이 와불은 일으켜 세워 보고픈 욕심이 생기는데 물론 상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혹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문화재 파괴하며 어디선가 일어날게 뻔한 일 에이... 관두자...... 그 옆의 칠성바위는 배열 상태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과 밝기를 반영한다고 하며 더나아가 운주사의 천불 천탑의 배열 위치가 밤하늘의 별자리 위치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운주사를 나와 도갑사에 들른 후 숙소로 들어간 걸로 첫날 일정은 마치고 다음날 아침 둘째날 답사를 시작하는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 않는가 우산 있는 애들도 많지 않던데... 어쩌겠나 그냥 비 맞고 가야지......

 

이튿날 첫 일정을 시작해 보자.......

  행선지는 대둔사 또는 대흥사라고도 한다. 그러나 원래 바른 명칭은 대둔사이고 대흥사는 일제때 쓰인 명칭으로 지금도 일주문에는 대흥사라 적혀있다. 그래서 이 두 이름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입구에서 대둔사 경내까지 이르는 길은 절에 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흔히 절은 속세를 떠나 깊은 산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처럼 숲 깊이 들어 앉아 있는 곳이 대둔사이다. 대둔사에 들어서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는다. 왜냐면 흔히 절의 본전으로 생각되는 대웅보전은 개천 건너서 옆으로 살짝 비켜서 있고 절 중앙쯤 되는 곳에 천불전이 버티고서 있기 때문이다. 천불전 옆으로 요사채와 다시 그 옆 약간 떨어진 곳이 유물관이 위치해 있다. 우선 먼저 가보아야 할 곳은 대웅보전, 천불전 담장을 왼쪽으로 돌아 작은 대리를 건너들어가면 대웅보전이다. 이 대웅보전 현판에는 조선 명필중 하나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고 고개를 90도 돌려 왼쪽승방위에 걸린 무량수각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그러니 이 곳에선 간단히 고개만 까딱거려도 두 명필의 글씨를 한번 볼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다시 대웅보전 문창살을 보면 부안 내소사의 문창살과 흡사한 아름다운 문양을 볼 수 있고 더 고개를 떨구면 돌계단에 조각된 돌사자인지 도깨비인지 독특한 문양의 머릿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곳에 있는 두 현판글씨는  그 곳에 있게 된 나름의 내력이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뒤돌아 나와 천불전을 거쳐 유물관에 가면 서산대사와 초의 선사의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서산 대사는 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스님이고 초의 선사는 다도로서 일가를 이룬 스님이다. 유물관까지 두러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지 가볍다. 좋은 글씨도 보고 훌륭한 스님들의 유품도 감상하였으니 근데 몸은 무겁다. 왠일 일까.

  대흥사에서 나와 해남읍쪽으로 가다보면 삼산벌이 나오고 그 벌판 한가운데 덕음산을 등에 기대 앉은 녹우당이 나온다. 이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와 그이 후손으로서 선비 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듀서가 난 곳이다.  해남 윤시는 임란이후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이래로 이 곳에 터를 닦은 집안이다. 해남 윤씨의 집안은 이 윤효정의 유언에 따라 장자 상속의 원칙을 고수하며 삼산벌의 재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고산과 공재 같은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자유당 시절엔 국회의원 윤영선 배출한 속말로 빵빵한 집안이다. 녹우당이란 명칭은 고산이 봉림대군의 스승이었는데 봉림대군이 효종이되어 그가 스승에게 수원에 지어준 집이라한다 그후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그 집의 일부를 뜯어다 고향에 내려와 지었는데 그 뜯어온 사랑채가 녹우당인 것이다.  또 녹우당이란 현판은 옥동 이서의 글씨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의 원조이다. 다시 이 동국진체를 이어받은 서체가 우리가 바로 앞서 보았던 대둔사의 이광사가 쓴 대광보전이란 현판 글씨이다. 이 집 바로 옆에는 높이30m에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유물관이 있다. 이 유물관에는 볼거리가 많은데 특히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압권이다. 둥글면서 긴 얼굴에 눈썹과 눈 꼬리끝이 살짝 올라가고 호랑이 수염에 두툼한 입술을 한 모습은 정면에서 마주보기에 섬뜻한 느낌을 받는다. 이 그림이 섬뜻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귀와 어깨선이 없어 마치 망나니가 후려쳐 효수해 놓은 것 같아서 인데 원래 귀와 어깨선이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지워진 것이라 한다. 이 그림은 조선의 초상화 중에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꼽은 것으로 국보240호로 지정되었으나 실물은 창고 깊이 꼭꼭 숨어 있고 전시된 것은 모작이다. 공재는 도한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가 되며 실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언 듯 생각키에 녹우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물관의 유물들은 국립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따로 국밥 마냥 그 귀한 유물을 집안에 보관하고 있으니 윤씨 집안 빵빵 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하면 실학의 대가이며 수원성을 축조한 사람이란걸 모르면 속된말로 간첩이다. 그 만큼 그의 이름 석자는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 다산 초당은 그가 18년 유배 생활 10년 동안 지낸 곳이며 그 유명한 목민심서를 저술한 곳이다. 또한 그의 호 다산은 이 곳 만덕산이 차나무가 많이 다산이라고도 불렸는데 거기서 따온 것이라 한다. 다산 초당까지 오르는 길은 약간 숨이 차다. 이마에 맺힌게 보슬빈지 땀인지 모르게 헉헉거리며 올라온 이 곳은 오른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앞마당이 의외로 좁다.  허긴 유배온 곳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마당을 가로질러 왼편으로 가면 사각형의 인공 연못이 나오고 더 들어가면 산허리를 살짝 돌아 천일각에 오르면 강진만을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뉘었다. 다시 초당에 오면 "다산초당"과 보정산방이란 두 개의 현판이 있는데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한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현판만 잘 보아도 세 명필으 글씨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 고찰이나 명승지에 갈 때는 한편 글씨도 유심히 볼 일이다. 중요한 건물인 만큼 명찰 글씨를 잘 써서 가늠에 달고 싶지 않겠는가? 정 명필을 못 찾으면 허다못해 그 건물 지은 자신이라도 글을 써서 뭍이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초당을 내려와 고려청자 가마터를 둘러보고 보림사에서 한숨돌린 후 낙안읍성을 거쳐 둘째날 일정을 끝냈다.

  마지막날의 첫 코스는 송광사다. 송광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이며 그 중 승보사찰이라 불린다. 이 곳에선 고려에서 조선초 까지 16분의 국사를 배출하였으니 승보사찰이라 불릴만 하지 않은가 국사란 나라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이니 굳이 비유한다면 기독교에서 추기경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도 이 곳에선 공부하고 차선하는 스님들이 많다. 이 곳에 들를땐 그 스님들께 방해 되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할 것이다. 꼭 이 곳 뿐만이 아니라 딴 곳에서도 그래야만 산사에 들어온 참맛을 조금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곳 성보각에는 많은 유물이 있으니 반드시 들러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산하나 건너 옆 동네인 선암사 흔히들 선암사를 부를 때 "봄의 선암사"라 부른다. 우리가 간 시기는 이른 봄이었으나 봄이 한창일때의 선암사는 그야말로 봄정원이라 고들 한다.. 절 입구에서부터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서 봄의 정취를 느끼며 들어가다 승선교에 이르면 절정에 다다른다. 여기선 조금 떨어진 누각 밑을 지나 경내로 들어오게끔 되어있는데 그리 큼 절은 아니나 볼품없는 절은 절대 아니다.

  이 곳에 들어와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는데 이 곳에 보관 중이던 유물이 간밤에 도난 당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오고 스님이 무엇이 사라졌는지 자세히 알려주는 것 같은데 그러면 뭐하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 모두들 그 모습에 씁쓸한 인상을 지며 조용히 물러나와 버렸다. 괜히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지으며........

   유물을 훔쳐간 x를 욕하며......            '이xxx같은 놈아!'

다음은 조선시대 양반가인 구례 운조루

이 건물은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른다. 이 운조루는 명당터라고 하지만 풍수를 모르는 내가 뭘 알겠는가? 명당터라고 하니까 그런갑다 하지 그러나 한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집앞에 펼쳐진 산이 울퉁불퉁하여 이 집을 빙둘러 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산들이 불의 형상이라 집 앞에 연못을 파 화기를 막았다고도 하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그제야 대문 앞에 연못이 있는 이유를 알았고 그 산들이 병사들의 형상이라면 이 집안이 무관 출신이니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이번 답사의 진짜 마지막 코스이며 하이라이트인 화엄사

  이 화엄사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큰절이다. 이 절의 입구는 음식점.상품점 등이 혼잡하지

 

만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나 절 코앞가지 오면 차에서 내려 경내로 들어 갈 수 있다. 처음 절문은 보통사대부집 대문처럼 생겼는데 이것부터가 색다르고 대문안을 들어서면 30도 정도의 오르막길이다. 여기서 두면 당혹스럽게 만들고 그 큰돌이 깔린 길을 오르면 대웅전앞 마당을 살짝 돌아 들어 가게 되는데 여기서 15도 정도 눈을 돌리면 딱 마주치는 각황전은 세 번째 느낌의 반전을 준다. 그 웅장한 건물에 압도당하는 놀라움은 좀채 느껴보기 힘든 경험이다. 화엄사는 아주 큰절이다. 경내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각황전 앞의 석등은 높이 6m 넘는 동양 최대의 석등이다. 여기서 다시 각황전 옆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4사자3층 석탑이 잇다. 이 곳에서면 북쪽으로 저 멀리 노고단이 보이고 남으로는 구례의 약간의 평지가 보이고 맞은편 동으로는 듬직한 산 줄기가 스쳐 내려간다. 내 개인적으론 아주 좋아하는 경치였다. 혹 시간이 나면 대웅전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15분정도를 따라 오르면 구층암이 있는데 그 곳의 기둥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써서 참 멋있는 암자가 있다.

  이것으로 2학년 1학기 답사 회고 정리를 마친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약간 언급했듯 답사는 옛것을 보러가는 여행이다.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거기서 앞으로 살아나갈 교훈을 얻어보자는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고 싶으면 여행을 많이 하라고들 한다. 이제 남은 마지막 한번의 답사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글은 2000년 가을에 떠난 경주답사의 내용중 한상훈 선배님의 글을 옴겨 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