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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처음 세웠던 절로서 사적 제6호이다.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게 하였다. 그로 인해 황룡사라 하였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사찰의 건물 배치가 완료된 것 같다.

그 뒤 574년에 5미터가 넘는 본존불을 비롯해서 금동으로 만든 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본존불을 모시는 곳)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6)에 세웠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고승 자장의 권유로 구층탑을 건립하게 되는데 당시 신라인의 기술로는 어려워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목재와 석재로서 건축하고 김용춘이 신라 장인 200명을 인솔하여 645년에 완공하였다. 탑신부 약 65미터, 상륜부15미터, 전체 80여미터에 달하는 구층으로 된 목탑이 완성됨으로써 4대 왕, 93년간에 걸친 대공사가 마무리되어 명실공히 국가의 절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신라 삼보(세가지 보물)중 장육존상과 9층탑이 이곳에 있었고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 원효 스님 등 고승께서 가르침을 널리 알린 곳이다. 그리고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나와 백고좌강회를 열어 부처님의 가호를 빌었다.

  1238년(고종25)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절 전체가 불타버린 뒤에는 다시 짓지 못하였다.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고문헌의 기록과 일치되는 가람변천과정이 밝혀졌다. 발굴 조사 결과 황룡사는 25,000여평의 늪지를 메워 대지를 조성하고 당탑(堂塔)을 배치하였는데, 최종 가람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남문·중문·탑·중금당·강당을 차례로 건립하고, 중금당 좌우에는 동·서 금당을 병렬로 배치한 다음 그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3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독특한 양식이었음이 밝혀졌다.

  출토 유물은 40,000여점에 달하는데, '皇龍(寺)'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와전류가 대부분이지만 토기, 금속 용기, 불상 등도 다수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토기와 금속 용기는 실생활 용구가 많았으며, 이들과 함께 출토된 다량의 중국계 청자류 등으로 보아 당시의 활발했던 대외 교류상을 알 수 있었다.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백제 지역의 익산 미륵사지 발굴 조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의 고고학적 발굴 사상 최대 규모·최장기간 진행된 발굴로 손꼽히는 중요 유적지이다.

 

 * 황룡사 구층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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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못가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황룡사의 용은 나의 아들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하였다.

  자장스님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탑을 만들게 하였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 개의 이웃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막기 위함이었다.높이 때문에 여러 차례 벼락을 맞고 또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내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25년(1283)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초석과 심초석만이 남아 있다. 이 심초석은 탑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이며, 탑의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다. 이 높이는 요즈음 건물로 따지면 30층은 될 높이이다. 절 건립 할 때 중심 불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이 후 계속 수리를 거듭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졌다. 이 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를 수리되는 등 숭앙을 받아 왔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터 발굴 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터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탑터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터와 같이 기단 상면에 노출되어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 형식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 황룡사 장륙상

 

  구층목탑과 함께 황룡사에서 만들었던 신라 삼보의 하나. 신라 최고의 보물로 숭앙되던 이 불상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대좌(불상받침돌)만이 금당터에 남아 있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573년(진흥왕34)에 만들기 시작해서 그 이듬해인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보낸 황금과 동으로 장륙존상을 한번에 만들었다고 한다.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5007근인데 황금이 1만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분이 들었다고 할만큼 거구의 금동삼존불상으로 생각된다. 장륙상의 높이는 1장6척이므로 약 4.5m의 우람한 상이 될 것이다. 명칭은 『삼국유사』에 보이듯이 석가삼존상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는 문수, 보현보살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대좌는 장륙존상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러한 모양은 좌우 불상대좌도 거의 비슷하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이 장륙존상은 현재 받침터만 남아 있을 뿐, 원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신라 삼보중의 하나로서 최대 걸작품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