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지역 개관

우리 나라 중앙 서남부에 위치한 도이다. 백제의 터전인 충청남도의 역사에 대해서 보면 백제는 본디 북방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유역에서 진 임금이 지배하던 마한의 일부를 이루었다가 점차로 발전하면서 언저리의 여러 부족을 합쳐 고이왕 27년쯤에 중앙 집권적인 정치형태를 가진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새로 일어난 백제가 마한의 지역을 아우르기 시작하자 충청남도는 백제와 마한이 맞닿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다가 백제가 근초고왕 때에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니 충청남도 지방은   백제의 영토로 들어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 두 임금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그 뒤에 북쪽에서 밀려오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개로왕의 참변으로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백제는 24대 동성왕이 백제 중흥을 위해 국력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의 제나라와도 문물을   교류하는 한편으로 남쪽의 탐라국을 합쳤다. 동성왕은 고구려의 세력을 막으려고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도 대전시 부근 탄현에 성채를 쌓고 신라에 대비한 것을 보면 평화와 전쟁의 양면 정책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 다음 무령왕은 그가 다스리던 스물세해 동안은 문화를 굳건히 다진 시기로써 중국의 남조와도 교류가 많았다. 백제는 성왕 16년(538)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게 되어 후기 백제시대의 문을 열었다. 성왕이 부여로 천도한 것은 중흥의 뜻이 나타난 것으로 곧 공주는 피난지로는 알맞으나 땅이 좁아 항구적인 수도로는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왕은 안으로 학예와 불교를 숭상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남조에 속한 양나라와  통하여 그 문물을 수입하여 국내 문화 수준을 높이고, 일본과 우호를 계속하여 불교를 전파하고 여러 방면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보내어 일본의 고대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성왕은 밖으로 북벌과 북진을 계획하여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데에도 있었다. 그래서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더불어 북벌을 감행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가 회복한 그 땅을 빼앗아 화친이 깨어지고 백제의 중흥의 꿈도 여기에서 깨어지게 되었다. 성왕은 다음해 구천에서 신라 북병의 기습을 받고 죽으니, 백제 중흥의 꿈은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백제 30대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백제를 배신했던 신하를 심하게 공략했다. 이에 신라는 외세인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백제를 침공하게 되었다. 백제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사비는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때가 의자왕 20년인 660년이었다.
 이와 같이 그 막을 내린 백제는 오늘의 충청남도 땅을 중심으로 하여 그 역사를 펼치다가 신라에게 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웅천주를 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신라 때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 귀족문화에 맞서는 지방문화가 웅천주에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혼란하게 되자 웅주 도둑인 김헌창이 822년에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또 호족 세력이 나타나고 후삼국이 생겨나자 충청도는 견훤과 궁예의 남북국세력이 패권을 다투는 싸움터가 되었다.
 궁예의 뒤를 이은 임금으로 추대된 왕건은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하고 남쪽의 후백제를 쳐서 빼앗으려고 충청남도의 천안과 온양을 근거지로 하여 후백제와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 17년인 934년인 지금의 충청남도의 대부분이 고려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부터 주 9개 중의 웅진에 속하였단 지역으로 한 단위가 된 충청남도 땅은 고려 때에 들어와 성종 12년에 설치한 공주목에 대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0개가 설치되던 14년에는 하남도가 지금의 충청남도에 해당되었다. 그러다가 예종 원년에 하남도에 관내로, 주원도가 합쳐져 '양광청주도'라는 도가 생겼으니, 이때부터 충청이 도 이름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종 4년 후기 5개도 제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에 충청남도 땅은 광충청도에 속하였으며, 그 뒤 명종 원년인 1171년에 광충청도가 양광주도와 충청도의 두 도로  갈라졌으니,  이때의 충청도가 오늘날의 충청도와 이름이나 징역이 같았다. 따라서 충청도의 확실한 기원은 이때부터인 것으로 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는 군사세력이 집권한 뒤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의 민란으로는 '오민의 반란' 뿐만 아니라 노비와 천민의 봉기도 두드러졌다. 신분사회의 변천과 그에 따른 관념의 변화가 노비와 천민으로 하여금 봉기하게 한 큰 원인이었다. 명종 6넌인 1176년 정월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 난은 천민집단의 신분해방과 농민반란이 겹친 반란이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조선 초기에 충청남도의 땅은 충청남도의 땅과  함께 양광도라 불리다가 태조 4년에 충주, 청주, 공주, 홍주를 포함한 도가 되어 충청도라  불리었다. 나라 땅을 8개도로 개펀한 태종13년에 대체로 지금의 충청남북도의 지역과 일치하게 되었다. 충청남도의 도 이름은 그 안의 어떤 고을에서 이따금 역모나 삼강오륜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면 한 동안 이름을 갈아야 했던 법에 따라 공충도, 충홍도,공홍도로 바뀔 때가 더러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위병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의병장 조헌과 그를 따르던 의병 칠백 여명이 금산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 곳이 지금 금산군 금성면에 있는 '칠백의총'이다.
 충청남도는 조선시대에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조운의 중요한 통로였는데 태안반도의 흥량(서산군 근흥면 안흥 앞바다의 광장목)은 뱃길이 아주 험난하여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변 있었다. 고려시대 때도 '굴포조거'라는 운하를 몇 십리 파다가 중단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두 차례에 걸쳐 공사를 한 적이 있으나 계단식으로 되어있어 불편하여 세조 때 개축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들어오자 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회의 논란이 된 것은 천주교가 유교의 제례를 거부하면서부터였다. 나라에서는 서학을 사교로 규정하여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천주교의 교세는 충청남도에 날로 확대되었다. 천주교도들이 두 해에 걸쳐 백 명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을 이 곳에서 낳을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편으로 조선 후기에는 사회의 혼란과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철종 13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 때 충청남도 지방에서는  회덕, 공주, 은진, 연산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 난은 근대사회를 준비하는 과도기에 폭발한 민란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 농민전쟁을 끌어들인 전국적인 민란으로 중요한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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