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골굴암
 
 

  석굴 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의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다.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 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 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 석굴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 전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 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 하였으며, 법당굴이니 설법굴이니 하는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 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정도의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서진다고 한다. 지금은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하우스 같은 둥근 모양의 투명한 보호 각을 설치하였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 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 크기만큼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은 원효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얼굴윤곽이 뚜렷하다. 타원형의 두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를 상감 했던 자리가 둥글게 파였다.두 눈은 멀리 동해를 내려다보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가는 눈엔 잔잔한 웃음이 머물고, 굳게 닫힌 입술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다. 
 입체감이 뚜렷한 얼굴에 견주어 신체는 다소 평면적이다. 왼손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짚어 배 앞에 놓고, 오른손은 파괴되었으나 본래 무릎 밑으로 땅을 짚어 마귀를 항복케 하고 선도하던 순간을 나타낸 것이 확실하다. 
 머리 뒤엔 연꽃이 후광에는 가늘게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으며, 옷 주름은 물결치듯 한 방향으로 조각되었다. 세련되지 못한 옷 주름때문에학계에서는 이 마애불상을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 주름들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안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오랜 비바람에 석회질 암석이 마모되어 오른쪽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가슴위도 벗겨져 버렸다. 무릎 부분도 무너진 상태일 뿐 만 아니라 풍화 작용으로 균열이 심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여 안타깝다 보물 제 581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