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감은사터
 
 
 
 
 감포 앞 바다를 뒤로하고 대종천을 거슬러 0.5km쯤 올라가면 양북면 용당리다. 이곳에는 장대하고도 훤칠한 미남에 견줄만한 석탑 두기가 우뚝 선 절터가 있다. 절터가 들어선 곳은 일부러 주위보다 높게 다진 듯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 여기에 풍채가 거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하는 삼층 석탑 두기가 나란히 서 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용당산을 뒤로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이었지만 당시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왜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공하여감은사라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금당 밑의 공간이다.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즉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 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좌우에는 동, 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 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 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 되도록 특수하게 만들었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임이 확실하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오른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 단정하는 데 이의가 없다.
 통일된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안정을 기원하는 뜻에서 감은사가 지어졌듯, 그 같은 시대정신은 웅장하고 엄숙하며 안정된 삼층 석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은사탑은 튼실한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 뒤쪽 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절터와 주변 경치가 어우러진 속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탑을 볼 수가 있다. 대종천 건너 아래쪽에서부터 두 탑을 올려다보는 것도 또 다른 멋이 있다. 감은사터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
 
 
  기운차고 견실하며, 장중하면서도 질박함을 잃지않는 이 위대한 석탑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삼층탑으로 화강암 상하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되었다. 
신문왕2년(682), 축조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초기 작품이다. 
 우선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 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 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매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 있다. 
 상층 기단 면석 역시 12매에 갑석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2주의 탱주가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 몸돌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하였다. 
 
  지붕돌의 구성은 각 층 낙수면과 층급 받침이 각기 따로 조립되었는데 각각 4매석이므로 결국 8매석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층급 받침은 각 층 5단으로 짜여졌고 낙수면의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있다.
3층 지붕돌 위부터 시작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으나, 현재 약 3.9m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 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13m로 우리 나라 삼층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찰주를 빼면 높이가 9.1m로 고선사탑과 비슷한 높이가 된다. 그러나 찰주가 없는 고선사탑에 견주어 본다면 이 찰주로 인해 석탑이 갖게 되는 상승감의 의미를 알게 될 터이다.
 탑의 완성 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3개의 몸돌을 실측해 보면 그 폭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으며, 높이는4:3:2가 아닌 4:2:2로 나타난다. 곧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눈 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으로 만약 정상적인 체감률을 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승감은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감은사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 감은사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 중 서탑3층 몸돌의 사리공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 모양의 청동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정교한 연화문 받침에 57 x 29.5cm, 깊이 29.1cm 크기의 함을 놓았으며 함의 네 모서리에는 팔부신장이 새겨져있고 각 좌우에 귀신 얼굴의 고리가 있다.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 감과 간절한 종교적 감성이 한데 어우러진 이 사리함은 보물 제366호로 지정,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청동사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