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불국사
 
 
 

                     불국사 전경
    '불국사' 하면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 덧붙이지 못하고 묵묵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범영루의 처마에 걸린 아침해와 긴 석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점 갖지 못한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수학여행에다 신혼여행에 효도관광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나라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간 관광지가 불국사이고 석굴암이다.
 그러나 실상은 불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불국사를 슬프게 하는 오해일는지도 모른다. 흔히 불국사를 조화적 이상미와 세련미를 보여주는 신라문화의 정수이며 완결편 이라고들 한다. 무엇이 그런 극찬을 받게 하는 것인지, 무지의 눈과 번잡한 마음을 싹 씻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불국사를 다시 보자.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땅위에 옮겨 세우려면 국민들의 합심과 그것을 뒤받침 해줄 만한 경제력, 곧 국력이 있어야한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불국사는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고 하는 등 불국사 창건에 관해『삼국유사』와 다른 기록을 보이지만, 이는 믿을만한 연대가 못된다. 다만 총2천여 칸에 이르는60여 동의 크고 작은 전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불국사 설경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중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석축만 남게 되었다. 창건 후 650여년간 뭇 사람들에게 참된 부처님,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로 기억되던 불국사는 그 뒤로 여러 차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으로 국력이 기운 뒤였고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던 까닭에 신라의 정신을 되살릴 길이 없었을 터이다. 그 뒤 자하문,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 등만 간신히 남아 있다가 1969년 발굴 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되었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지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낱낱의 영역은 영역에 이르기 위한 계단, 영역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대웅전 영역
 
  이 영역은 다리(청운교, 백운교)와 중문(자하문) , 건물(대웅전과 무설전)이 남북 일직선상의 축으로 중심을 이루며 이를 감싸고 있는 회랑으로 이루어졌다. 남북 일직선상에 가람이 배치된 것은 평지 가람에서 지켜지던 규율이 산지 가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엄정함을 보이는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등과 석가탑, 다보탑이 있고, 앞쪽에 범영루와 좌경루가 좌우대칭이 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꽤 넓은 대웅전 앞 공간이 활기를 잃지 않는 것은 이런 석조물들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까닭이다.
  흔히 불국사를 돌아볼 때 놓치기 쉬운 것이 경내로 들어가기 전의 석축장치이다,
불국사는 다른 절과는 달리 경내로 들어서면 크게 둘로 갈라지는데, 석축 위는 불국이고 그 아래는 범부의 세계이다.

범영루
퍽 단아한 모습의 석축 은1층 기단엔 큰돌을, 2층 기단에는 작은 냇돌을 쌓았으며, 그사이에 인공적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기둥을 세워 지루하지 않게 변화를 주었다. 석축의 단아함은 두툴두툴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과 인공으로 다듬은 매끈한 돌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화합을 이룬 데서 비롯된다.
 특히 불국사 축대의 자연과 인공의 조화는 인공적인 틀 속에 자연스러움을 끼워 넣은 멋을 보여준다.
 

                      백운교 청운교
 또한 석축 중간에 다리(연화,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를 내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처마가 돋보이는 범영루와 좌경루를 세워서 수평적으로 만들러진 것 같은 석축에 변화를 주었다. 불국세계의위엄과굳셈을함께상징하는이석축으로 불국과 범부의 세계가 분되며,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 칠보교가 두 세계를 잇는다.
 대웅전 경내에 들어서면 불국사의 사상과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시선을 끈다, 두 탑은 서로 크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모양과 그 주변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경내를 장엄한 불국토로 만들고 있다. 다보탑과 다보탑은 각기석가여래상주설법탑과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불교의 이상이 이곳에서 실현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갖는다.
창건 당시 대웅전의 본존불시각에서 두 탑을바라보면 화려한 다보탑 뒤로는 단순한 건물인경루가들어섰고, 단아한 다보탑 뒤로는화려한 종루가 배치되어 각기 생김새가 다른 두 탑과 누각이 전체적으로 다양함 
속에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는 균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원래 모습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복원되는 과정에서 종루와 경루는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불국사 무설전
 또한 대웅전 앞 공간이 갖가지 조형물로 밀도 있게 구성된 반면, 뒤쪽의 무설전 앞은 아무 조형물 없이 빈 공간을 이루는것도 의미 있는 대조이다.
 대웅전 앞의 석등과 봉로대도 주목할 만 하다, 석등은 신라의 것으로 가장 오랜 것에 속하며 소박하면서도 늠름해 보인다. 석등앞에 면마다 안상을 새긴 석대가 향로를 얹어 향을 피우던 봉로대이다. 불국사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 건물은1695년에 다시 세운것이고, 기단은 신라 때 것 그대로이다.
 백운 청운교와 대웅전을 잇는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 중건할 때 만든 동서 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 양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 범영루로 복원되었다. 대웅전 뒤쪽의 무설전은 경론을 강의하는 곳으로, 신라 때 만든 기단 위에 아홉개의 기둥이 다섯 줄로 서서 육중한 맞배지붕을 떠 받치고있는 잘지은 강당이다.
 말이 많이 오가는 곳이 강당인데 이름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이 없는 곳' 이라는 뜻, 지극한 진리에 이르려면 모든 진리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여기에서 느끼게 된다. 꽤 넓은 대웅전 영역에는 모두 회랑이 둘러져 있다. 회랑을 건립한 근본 취췰지는 부처에 대한 존경의 뜻이다. 대웅전의 정문을 바로 출입하는 것은 불경(不敬)을 의미하므로 참배객은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따라 움직인다,
 
 무설전 뒤쪽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피라미드식의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가파른 계단을 낙가교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회랑이 어떻게 무설전과 대웅전을 두르고 있는지 잘 볼수 있다. 범영루와 좌경루가 솟아있는 석축 중앙에 쭉 힘차게 내뻗은 계단이 있다. 위쪽의 16계단이 백운교이고 아래쪽의 18계단이 청운교이다. 
이 돌계단을 올라서면자하문을 거쳐 대웅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청운교 밑에는 무지개 처럼 둥근 들보 모양으로 만들어진 홍예문이 있다. 지나치게 고요하고 안정된 긴 석축에 둥근 곡선으로 변화를 일으켜 생동하는기운을불어넣고있다. 
                            불국사 관음전
원래 석축아래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계단왼쪽에 토함산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게 한 수구가 남아있다. 이 수구(오른쪽 사진)에서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면 거기서 이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못 위에 놓인 청운, 백운교와 연화, 칠보교, 긴 회랑과 경루, 종루 등 높은 누각들이 거꾸로 물위에 비쳐 절경을 이루었을 터이다.
 청운. 백운교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이다. 자하문은 석가모니의 피안세계인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는데 자하문이란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이다.이 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국보 제23호로 지정돼 있다.
 한편, 자하문에서 내려다보면 범영루와 좌경루를 받들고 있는 주춧돌이 보인다.
특히 범영루의 주춧돌은 특이하게 쌓여 있다. 주춧돌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기 8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밑 부분을 넓게 하고 중간에는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다시 밑 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모방할 수 없는 신라특유의 슬기이다,
 
 

 다보탑
 
 
  사면으로 계단을 놓은 사각의 육중한 기단 위에 날개를 편 듯 힘찬 추녀가 가로 뻗친 사각 기와집 형식이며 , 그 위에 연꽃잎 모양으로 창문을 낸 팔각정이 세워진 3층 양식의 화려한 탑이다. 팔각지붕에는 귀마다 풍경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다. 탑의 높이는 10.4m이며 국보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다보탑은 다른 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화려한 탑으로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각 부분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답다.
다보탑은 그 화려함만큼 설명이 시끄러울 정도로 복잡한 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짜증을 만들어내는 복잡함이 아니라 정교함과 조화를 느끼게 하는 세밀함이라는 데에 묘미가 있다.
1층은 억센 사각, 2층은 아담한 팔각, 3층은 부드러운 원. 이렇게 변화를 주면서 강함은 차츰 연약하게 되고 억센 힘은 점점 부드러워진다. 
 1층은 억센 사각, 2층은 아담한 팔각, 3층은 부드러운 원. 이렇게 변화를 주면서 강함은 차츰 연약하게 되고 억센 힘은 점점 부드러워진다. 사각의 기와집 앞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네 마리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아있다.
 하지만 연화대좌에 새긴 꽃 모양이며 화려한 목걸이로 미루어보아 이 사자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장식적인 사치를 즐겼던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짐작도 된다.흙을 주무르듯 돌을 잘 구슬리고 다듬어낸 것이 다보탑의 솜씨라면, 석가탑의 솜씨는 커다란 통돌의 크기를 줄이면서 깔끔하게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보탑 돌사자

 

 석가탑
 
 
  튼실한 2중의 기단 위에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단순한 모양으로 크기가 줄어 들면서 차곡차곡 쌓아져 3층으로 솟아오른 석가탑은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고선사터 삼층석탑에서 이어지는 통일신라삼층석탑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탑의 높이는 8.2m이며 국보 제21호로 지정돼 있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큰 손상 없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왔다. 1966년 보수공사도중 석탑 안에서 사리 장엄구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이라 할 수 있는 무구 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석가탑이 보여주는 완벽한 균형미는 치밀한 계산으로 만든 상승감과 안정감에서 비롯된다. 1층의 몸돌과 2,3층의 몸돌의 비율이 4:2:2를 보이는 것은 감은사 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쪽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다.
 또한 지붕돌의 끄트머리를 보면 위로 치켜올려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붕돌의 낙수면 끝을 사선으로 
내려친 것으로 끝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단정한 기단부와 탑신부에 비해 상륜부가 다소 시끄럽고 무겁게 보이는 것은 석가탑보다 백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떠 만들어 얹었기 때문이다. 또한 석가탑 아래에는 넓은 꽃잎으로 된 팔방금강좌가 둘러져 있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더해준다.
 석가탑은 '무명탑'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탑을 만들었다는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가 불국사 입구매표소에서 멀리 서쪽으로 내다보인다.
 
 
 

   팔방금강좌
 
 
    석가탑 주위에 팔방금강좌라 불리는 연꽃대좌 8개를 만들어 놓은 데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다.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칠보탑이 땅에서 솟아나와 큰소리로 석가의 말이 진리라고 하였다. 이때 제자들이 다보여래를 뵙기를 청하자, 석가여래는 백호에서 빛을 내어 찬란한 부처의 세계를 임시로 만들고, 팔방에 금강좌를 만들어 온 우주에 차있는 부처님의 분신을 모여앉게 하고  다보여래를 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석가탑 주위에 이 팔방금강좌를 놓은까닭은 석가탑에 석가여래가 상주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비로전 영역

  비로전은 무설전 뒤쪽 높은 곳에 있으며 관음전 왼쪽 아래에 있다. 건물은 1973년 대복원공사 때 고려 시대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비로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비로자나불이 있다. 비로자나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여러 부처 가운데 가장 높은 화엄 불국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다. 비로전 앞뜰에는 얼핏 석등으로 여겨지는 회백색의 화려한 고려 초기의 부도가 전각 안에 갇혀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상
 
 
     높이 1.8m, 머리 높이는55cm,폭은1.36m이다 몸은 바로 앉아서 정면을 향한      모습이고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잡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불계를표시하고왼손은중생계를표시한 것이다, 지권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 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살진 듯한 얼굴에서 중후함이 느껴진다.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어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다부지게 꼭 다문 입술, 지긋하게 아래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비로운 눈, 단정히 결가부좌하고 손을 지권인으로 하여 가슴 앞에 들고 있는 힘찬 모습은, 민첩한 활동력을 나타내는 부드럽고 힘차게 흐르는 옷자락과 더불어 8세기 중엽 통일 신라시대의 씩씩한 기상을 보여준다. 국보 제27호이다.
 

 부도

  안상이 새겨진 팔각대석 위에 탐스러운 꽃잎을 밑으로 늘어뜨린 연꽃받침을 놓고, 그 뒤에 서로 얽혀 하늘로 오르는 구름 기둥을 세우고 다시 피어오르는 연꽃을 얹어 대좌를 만들었다. 그 조각장식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연꽃대좌위에는배가부른등근탑신을놓았는데, 사방에 감실을 만들고 석가모니불, 다보불, 제석, 범천을 사방불로 새겼으며, 십이각의 기와지붕을 본떠 만든 지붕돌을 얹었다. 높이 2.06m이다. 고려 소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나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른 데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장식의 부도로, 현재 좁은 전각 속에 갇혀 있어 무척 답답해 보인다. 보물 제61호로 지정돼 있다.
 
 

극락전 영역

  무설전과 대웅전의 서쪽 회랑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극락세계의 중심 건물인 극락전이 있다. 불국사 입구에서 부터 들어오면 석축 왼쪽에 있는 연화. 칠보교를 밟고 안양문을 올라 이르게 되는 곳이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이 후, 영조 26년(1750)에 중창되었다가, 1925년 일제 때 다시 지어졌다.
 극락전의 정연한 기단부는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나 그 위에 근래에 지어진 건물이 기단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극락전 안의 아미타불을 모신 목조 수미단은 일제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극락전 앞에도 대웅전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시기에,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진 석등과 봉로대가 놓여 있다.
 안양문에서 연화, 칠보교를 다시 한번 더 내려다보며 연꽃무늬를 확인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불국사 들목에서 주목했던 석축의 옆면을 보게 된다. 평지인 정면 쪽에서 보는 석축과는 또 다르게 단정하고도 시원한 눈맛을 준다. 그 비결은 자연돌 중간에 끼운 인공 돌이다. 언덕 위에 지었기 때문에 측면이 되는 비탈길의 축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 제였다. 그런데 인공 돌을 수평으로 놓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비스듬히 경사지게 놓아 비탈을 올라간다는 느낌을 주어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지상에 구현된 불국토의 세계를 돌아보고 다시 불국사의 석축 아래로 내려서면 범부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두쌍의 당간지주와 석조가 눈에 띈다. 연화, 칠보교 앞 널찍한 뜰에 서 있는 두쌍의 당간지주는 크기가 다른데, 이는 불국사가 여러 차례 중수되는 동안 각기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당간지주 앞에는 거대한 석조가 놓여 있다. 이는 신라 석조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게 큰 것으로 둔탁하고 장중한 돌로 만들어졌으나 경쾌하다. 특이하게도 바로 옆에 석조를 덮었던 돌뚜껑이 놓여 있다. 좌경루 앞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석조는 지금도 물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고 있어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의 목을 적셔주고 있다. 이처럼 볼 거리가 풍부하고 뜻이 깊은 불국사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돼 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안에는 아미타여래불상이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놓고 가슴께로 올린 왼손은 엄지와 장지 손가락을 짚어 극락에 사는 이치를 설법하고 있는 자세이다. 풍만하고 탄력 있는 살결위에 간결하게 흐르는 옷주름, 전체적으로 인자하고 침착한 모습의 이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신라시대 금동불상 중 가장 크고 훌륭한 것이다. 높이 1.66m, 머리 높이 48cm ,무릎의 너비 1.25m의 크기로 8세기 중엽의 작품이며 국보 제27호로 지정 돼 있다.

 
 

  연화, 칠보교

 연화, 칠보교의 양식은 청운, 백운교와 같으며 다소 규모가 작을 뿐이다. 연꽃잎이 새겨진 아래쪽 의 계단이 연화교이고 위쪽이 칠보교이다. 연화교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고 사람들의 통행이 심했던 까닭에 거의 마멸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양문에서 내려다 보아야한다. 이 계단을 거쳐 안양문에 오르고 안양문을 통과하면 아미차의 극락세계인 극락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오르는 계단 하나하나에 조각된 활짝핀 연꽃은 불국으로 향하는 걸음을 향기롭게 한다. 국보 제22호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