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석굴암
 
 

석굴암 전경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와 과학의 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이며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하늘끝과 맞닿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봉우리들이 하늘과 만나는 절경을 볼 수 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이어진 도로로 차를 타고 약5km정도 올라가 주차장에 하차한 후 십여분 가량 산길을 걸으면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석굴암은 경덕왕10년(751)에 착공하였으며 김대성이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돼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우선 전실에서부터 배치된 조각을 살펴보면, 석벽 좌우에 팔부신중 4체씩이 각각 마주보고 있고, 연이어 금강역사가 한 체씩 서 있다.  일반 사찰과 견주어 보면 이들 조각은 사천왕문 같은 도입부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전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단정 짓기가 어렵다.
   전실과 주실은비도(扉道)로 연결돼 있다. 비도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두 체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러싼 공간으로 되어 있고 앞쪽 좌우에는 돌기둥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좌우에 차례대로 천부상 하나, 보살상 하나, 십대 제자상 다섯, 그리고 본존불바로 뒤에 십일면 관세음보살이 있다. 십일면 관세음보살 위로 본존불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광배 양옆으로 각 다섯 개의 감실이 있다. 감실 안에는 문수, 유마, 지장 등 기타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좌우 넷씩 모두 8체뿐이며, 나머지 두 감실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전실의 조각까지 합하면 현존하는 석굴암의 조각은 모두 38체로 저마다의 특징과 표정이 잘 표현되었다. 주실의 본존불은 일반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고 관음상은 관음전을 다른 보살 군상들은 천불전쯤에 해당된다 하겠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본존불 바로 위에는 연화문을 새긴 하나의 큰 천개가 있다.  이 천개에는 석굴암을 지을 때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천신이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하는 김대성의 꿈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 줄의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석굴암에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정선은「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 입구에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일제 시대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마치 자신이 이 석굴암을 지하동굴에서 발굴한 양과장선전하여, 이후 일본의 무뢰한들이 우리의 수 많은 문화재급 유물들을 반출해 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제는 석굴전체를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도 한다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터 온 석굴암은 그 자체 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 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후 석굴암은 해방 뒤 혼란한 사회 속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이 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습도를 유지한다 하여 일차 시멘트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러고는 따로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석굴암내부에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향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 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앞뒤로 외부와 완전 차단된 석굴암은 이제 스스로의 자정능력을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습도나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 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일반 관람객은 목조 전실로 들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 

천장 연화문
 본존불은 연꽃잎을 엎어놓은 화대석과, 팔각중대석 연꽃을 위로 떠받드는 상대석이 갖추어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살포시 땅을 짚어 부처의 영광을 증명함으로써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연화대좌는 높이 1.6m,기단 최하부는 직경 3.7m이며, 본존불의 높이는 3.4m이다. 통일 이전의 부처들이 주로 입상으로 다정하게 웃고있는 모습이었던 것과는 달리 석굴암의 본존불은 높은 단위에 앉아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승리자의 모습이다. 본존불은 성냄도 없고 뚜렷한 미소도 없으나 명상과 깊은 침묵이 감도는무(無)의세계를 만들어 범인이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위엄이 흐른다.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 없이 부드럽게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한 어깨선, 가부좌한 두 다리와 무릎, 두 팔과 손, 반쯤 내린 눈, 온화한 눈썹, 양미간에 서려 있는 슬기로움, 자애로운 입가, 그리고 백호. 이 모든 선들이 조금의 허점도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돌 위에 마치 얇은 천의를 걸친 듯 옷 주름도아름답게조각되었다.
 본존불 뒤 벽에 깊숙이 새겨놓은 소박하고도 빼어난 연화문 광배는 본존불의 영광을 드러낸다. 광배를 불상에 직접 붙이는 일반적 방법과는 달리 간격을 두고 멀리 배치하여 더 입체적인 조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광배의 둘레를 돌아가며 장식한 연꽃잎을 위로 올라 갈수록 크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게 한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불두의 크기가 몸의 크기에 비하여 크게 만들어진 것도 이와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또한 본존불은 주실의 한가운데에 자리하지 않고 뒤로 약간 물러난 위치에 있다. 이는 앞을 향해 전진하는 듯한 동적인 이미지의 본존불을 만든다. 만약 본존불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주실이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신비로움을 가득 간직한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그런데 1913년 중수 때 비도와 본존불사이에 있는 좌우 돌기둥을 연결하는 아치형의 양석(梁石)을 가로질러 놓아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본존불의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 하는 판단을 두고 서로다른 견해가 있으나 우선 석가모니불의 특징인 항마촉지인을 하고있다는 점, 둘째, 본존불 주위에 십대 제자가 있고 문수와 보현 보살이 협시하고 있다는 점, 셋째,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현장스님이 부다가야에서 본석가모니성도상이 당나라 척도로 폭11.8척, 높이 13.2척이라고 「대당서역기」에 적고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석가모니성도상의 크기인 폭 11.8척, 높이 13.2척으로 만들었다는 점 등으로 석가모니불로 판단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수광전' 이라는 현판 등이 있었던 것은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 신앙의 요소를 받아들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촉지 항망인

 

   원형삼층석탑

  석굴암을 나와 요사채 앞을 가로질러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독특한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원형의 지대석과 팔각 원당형으로 된 2중 기단에 방형의 3층 탑신부가 놓여진 독특한 양식의 삼층석탑이다. 이런 석탑형식은 매우 독특한 예인데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높이 는 3.03m이며, 8세기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각 몸돌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는데, 특히 1층 몸돌은 2층 몸돌에 견주어 훨씬 크고 높직하다. 각층의 지붕돌 층급받침은 3단이며 지붕돌은 평평하고 얇은 형태이다.
크고 높직한 1층 몸돌은 둥근 대좌와 잘 대비되고 있다.
 직선적인 처마, 얇고 산뜻한 낙수면은 단아하게 느껴지며, 전체적으로 원과 사각, 팔각이 조화를 이루고. 기단부와 탑신부 상하가 균형을 이룬다. 보물 제911호로 지정돼 있다.
 그 밖에도 석굴암 아래쪽에는 해체, 수리 당시 복원되지 못한 석재들 이 방치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