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률사
 
 
            
                백률사 전경
굴불사터 사면석불 위쪽에 상당히 길게 뻗어 올라간 돌계단이 있다. 백률사로 오르는 계단이다.  현재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밖에 없어 조용한 절이지만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화랑 부례랑을 구출한 대비천에 얽힌 이야기 등 이적이 많은 곳이다. 절의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효소왕 2년(693)에 백률사와 대비천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았고 그의 목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이곳에 떨어지는 이적이 생기자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영험들과 더불어 상당히 번창한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창건 당시 이 절의 이름은 자추사(刺楸寺)였으나 어느새 백률사(栢栗寺)로 이름이 변했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것이다. 대웅전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선조 때에 중창한 것이다. 대웅전 동쪽 암벽에 칠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신라 시대의 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 순교 공양비가 경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등산길이 소롯이 나있다. 이 등산길을 따라 약 5분 오르면 경비초소가 나타나고 여기에서 북쪽으로 약 50m 아래 지점에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삼존마애불좌상이 있다. 조각수법은 우수하나 보존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석불이 새겨진 바위 위쪽에 손으로 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을 풍화로부터 보호하려는 어떤 장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률사 뒤 소금강산 정상은 경주시내가 가장 잘 보이는 곳 중의 하나이니 꼭 올라가 볼일이다.

 
  금동약사여래입상
 
                            
                     금동약사여래입상
 높이 약 1.79m의 입상으로불국사의비로자나불,아미타불과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3대금동불상이다. 머리는신체에견주어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둥근형이다. 긴 눈썹, 가는 눈, 오똑한 코, 작은입에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아 보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아랫배가나오고상체가뒤로젖혀지면서우람한체구를과시하고 
있지만 이에 견주어 어깨는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두 손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발과 발톱의 표현은 섬세한 편이다. 
어깨와두팔에서내려온옷형의주름은하나씩엇갈리면서자락이 
발 위까지 U자형으로 정연하게 늘어뜨려져 있다. 
 이 U자 중심이 끊어지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약사여래에기원하면모든병이치유된다하여신라때부터 
공주나귀족의부녀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불상이었다. 1930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구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28호이다. 백률사에서는 그 동안 긍동약사여래상을 돌려달라는 청원을 몇 차례나 관계기관에 했지만, 한 번 박물관에 들어간 불상은 영영 나올 줄 모르고 있다. 
 
 
  

      이차돈 순교비
 
법흥왕14년(527)불교의융성을위해순교한이차돈을추모하는공양비이다.   
육면의 특이한 기둥 형식인데, 다섯 면에는 명문이 있고 나머지 한 면에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비의 밑 부분에는 별석의 대석이   
있었고 위에는 지붕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마멸이 심하여다섯 면에 있는 비문은 거의 읽을 수가 없다.  
다만 판독할 수 있는 단어들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  
기록과 일치하며, 양각된 그림을보아도이차돈의 순교비라는 것이 확실하다.약간허리를굽혀공수하고있는인물상의머리는땅에떨어졌고,  
머리없는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꽃비가 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을 추상적인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인물상이 입은 복장은 부인의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이는 상의인데,  
신라복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이 공양비는 비문의 마멸로 건립연대도 작가도 알 수가 없으며, 다만 비문의 글씨에 의해 혜공왕 2년(766) 이후에 건립된 것만 알 수 있다. 
비문은 창림사비문글씨로중국에까지이름을 떨친김생의글씨라고전한다.  
김생은성덕왕10년(711)에 태어나 팔십 평생 붓 들기를 쉬지 않았으며, 예서와초서할것없이모두신필(神筆)로인정을받았다.   
                        
            
                 이차돈 순교비     
 

읽을 거리

 백률사 관음상의 영험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에는 관음상이 하나 있는데 참으로 영험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불상은 중국의 신장을 만들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관음상의 영험담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기 692년 효소왕은 부례랑을 국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그 문도는 1천명이나 되었는데, 부례랑은 그 중에서도 안상이라는 화랑과 친했다. 693년 3월에 부례랑은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현 강원도 통천)에 놀러갔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은 놀랐다. 더 욱 그 직후에 천존고에 있던 보물인 현금과 신적(만파식적)이 감쪽같이 없어져버린 일이 일어났다. 왕은 "내가 복이 없어 국선을 잃고 두 보물까지 잃게 되었다" 라고 탄식하고, 두 보물을 찾는 사람은 1년 조세로써 상금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그 해 5월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의 부처 앞에서 며칠 동안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향이 놓인 탁자 위에 난데없이 현금과 신적이 놓여지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나타났다. 놀라는 부모에게 부례랑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례랑이 잡혀가 그곳 대신의 집 말먹이가 되어 들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문득스님 한 사람이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 그를 위로했다. "고향에 가고 싶다." 고 부례랑이 말하자, 스님은 그를 바닷가로 데려가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을 각각 타게 하고 스님은 현금을 타고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 스님이 바로 관음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에는 신라인의 관음신앙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현세지향적이고 복을 구하는 신라인의 믿음과 통한다. 이러한 얘기를 간직한 백률사의 대비상은 임진왜란때 없어진 듯 하다.
 

 
이차돈(異次頓)에 대하여..
 
506(지증왕7) - 527(법흥왕14) 신라 최초의 불교순교자.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태어난 해가 501년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미상이며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감문왕의 후예라한다. <<산국유사>>의 주(註)에 보면 김용행이 지은 아도비문(阿道碑文)에는 그의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흘해왕(訖解王)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 당시의 왕이었던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불력(佛力)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할 수가 없었다.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왕에게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라 하고 거짓 전명(傳命)한 죄를 내려 자신의 머리를 배면 만인이 다 굴복하여 교명(敎命)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흥왕이 이를 반대하였으므로 이차돈은 다시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身命)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불교)가 행하여지면 불일(佛日:부처)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가 길이 편안할 것"이라 하면서 왕의 허락을 청하였다. 마침내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이차돈이 왕명을 받들어 불사(佛事)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신들은 크게 흥분하며 왕에게 물었다. 왕은 자기 자신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이차돈이 한 일이라 하고 이 불법(佛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에 유익할 것이니 국령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신하들의 반대가 커지자 왕은 이차돈과 처음 약속한 대로 하리(下吏)를 불러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하였다.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 하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젖이 수십장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하여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 때 이차돈의 나이 26세였으며 연대는 법흥왕 15년 또는 16년이라는 설이 있다. 수년후인 534년(법흥왕 21)에 천경림에는 신라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졌다. 절이 완공되자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해마다 그의 기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를 추모하였다. 흥륜사는 그 이후에도 더 확충, 증축되었는데 544년(진흥왕 5) 2월 금당(金堂)이 완성되어 십성(十聖)을 모실 때 이차돈도 그 가운데에 모셨다. 또 이차돈을 위하여 자추사를 세웠는데 이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영화를 얻고 불도를 행하여 법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순교장면을 상징하는 육면석당이 현재 경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석당은 그의 죽음을 영원히 공양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