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98305046 이강모
 
  경주의 역사는 곧 신라(新羅)의 역사이다. 신라, 신로(新盧), 시라(斯羅), 서나(徐那),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등의 국호 모두 마을(邑里)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라의 국호는 덕업일신(德業一新)과 사방망라(四方網羅)의  끝 자를 딴 것으로 윤리의 확립과 통일의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신라 천년의 고도, 이 곳 경주는 가는 곳마다 그 옛날 문화의 정수를 담은 사찰, 석불 등 많은 사적지와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찬란했던 그 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왕조의 여화를 더듬을 수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한 우리 민족 문화사에 가장 황금시기였던 통일신라문화의 도도한 향기와 정취가 흔적마다 스며들고, 그 유현한 예술적 신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신라 왕업 992년의 역사가 거리거리마다 계곡마다에 서려있는 서라벌 옛터는 우리 민족문화의 고향이요 정신문화의 터전이다. 
                     
 고대 신라의 모체는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사로부족이다. 이 사로부족이 부족연맹체로 발전하는 시기는 AD356 ~ AD 402년 동안 왕이었던 내물마립간 때부터로 추측한다. 신라는 삼국시대의 후기에 유력한 국가로 발전했으며, 다른 두 왕국에 비해서 더 귀족적이었
으며, 덜 호전적이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 씨족이 돌아가며 왕위를 세습했으나 4세기 중반부터는 김씨족에서 영구적으로 왕위를 세습했다. 경주는 신라 문화의 발상지이며 신라가 고려에 흡수통합되는 936년까지 신라왕국의 수도이었다.통일 신라 시대  676년부터 2세기 반 동안 신라는 번영과 영향력이 세계의 어느 누구도 따라잡지 못하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국내외적으로 전쟁이 없었고, 이 시기에 평화와 모든 예술에 있어서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을 포함한 외국인 방문객들이 신라의 평판을 듣고 한반도에 나타났다고 하며, 현재의 경주시 지역에 있던 신라의 수도에는 인구가 백만명에 달했으며, 그 수는 현 도시의 7 ~ 8배의 크기가 된다
 고려 935년(태조18)경순왕이 항복해 오자 읍호를 경주로 개칭하고, 그곳을 경순왕의 식읍으로 하는 한편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관직을 관장하게 하였다.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시키고 종전의 6부 명칭을 고치면서 신라시대의 양주(良州)지역을 경주 중심으로 개편함에 따라, 이곳은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 또는 그 뒤 경상도의 본영으로 영남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성종 때는 동경(東京)이라 고치고 개성, 평양과 함께 고려삼경의 하나가 되었다. 이곳을 본관으로 한 삼성, 육성 출신의 지배세력
들은 고려의 진정에 따라. 상경관인과 토착향리층으로 분화하여 고려의 문벌귀족에는 경주출신이 많았고 무신집권기에는 신라부응을
위한 난이 일어난 적도 있다. 몽고의 침입 때는 황룡사구층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고려말에는 왜구의 피해가 컸다.
 조선  초기 8도체제의 확립에 따라 계림부가 디시 경주로 환원되고, 경상도의 감영은 상주로 옮겼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아래에서는 경주진관이 설치되어 경주부윤이 병마절제사를 겸임하였고, 예하에 울산, 양산, 영천, 홍해 등의 진을 거느렸다. 현재의 호구수와는
성질이 다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속현을 제외한 본부의 호수는 1,552호, 인구는 5,894인 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에 의하여 경주성이 함락되었으나, 곧 의병장 김호(金虎), 좌병사 박진(朴晉)등의 역전에 의하여 탈환되었는데,
이때 비격진천뢰라는 새로운 화포가 사용되었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1789년(정조13)의 경주부는 16개 면에 269개리를 포용한 대읍으로 읍내면의 호수는 1,907호, 인구는 6,236인이었다. 경상도 4개 계수관(界首官)의 하나인 경주 부는 도내 동남부의 중진(重鎭)으로 지방의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다.
 근대 1895년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가 개편되어 8도를 23부로 바꿀 때 부에서 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 경주군으로 되었다. 1910년 면제의 실시에 딸 종전의 경주군 읍내지역이 경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 면제 시행에 따라 다시 경주읍
으로 승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신라의 유적들이 발굴되고 몇몇 주요 기념물들이 보수되었다. 이들의 발굴결과는 여러 출판물을 통하여 신라 수도로서의 경주를 다시 부각시키고, 신라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민족적 감정이 현실적 사업으로 구현되어 경주가 고대문화에 대한 긍지와 애정으로 본격적인 보수, 보존, 개발 사업의 대상으로 된 것은 1945년 광복후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