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을 만든 사람들

수원성을 만든 중요 인물로는 정조 대왕과 정약용이있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로이 성곽을 쌓음으로써 둘레가 4,424m이고, 넓이는 약 206만㎡에 이른다. 이 성곽은 정약용의 서양식 축성법에 기초를 둔 성제(城制)에 따라 설계되었다. 공사에는 거중기 등의 기계를 활용하였고, 재료로는 돌과 벽돌을 사용하되 규격화한 점이 특색이다

            정조 ( 正祖 )
  1752∼1800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년). 아버지는 사도 세자이고,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탕평책을 계승하여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뛰어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여러 방면에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문집으로 <홍재전서>가 있다.
 

             정약용 ( 丁若鏞 )
  1762∼1836  조선 시대의 실학자, 문신. 호는 다산(茶山)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정조 말에 카톨릭교 신자가 되어 한동안 좌천되었다가 다시 좌부 승지, 형조 참의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01년(순조 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진에서 19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오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독서와 저술에 힘써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10여 권의 책을 지었다. 1818년(순조 18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벼슬이 승지에까지 올랐으나, 오래지 않아 벼슬길에서 물러나 저술과 신앙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유형원, 이익을 거쳐 내려 온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일컬어진다. 세상을 떠난 뒤 규장각 제학의 벼슬이 내려졌다. 주요 저서로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있다.

 

 

한국 전통도자기의 재현 -

이천도예이천은 도자기의 대표적인 산지로 이름나 있고, 300여 개의 도자기 가마가 모여 있는 신둔면 일대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도예촌으로 유명합니다. 이천이 도자기의 명산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데에는 도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흙이나 그것을 굽기 위한 땔나무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외적인 여건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통도자기를 재현하여 계승발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둔면, 백사면 일대의 선사시대 유적지나 설봉산성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유적지의 발굴을 통해 이천지역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토기제작이 활발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신둔면 수광리와 백사면 조읍리 점말, 장호원 노탑리 등지는 6.25사변 이후 60년대 초까지도 옹기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신둔면 수광리의 칠기제품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품이었습니다
  1950년대 전통도예를 부활시키고자 한국조형연구소('성북동가마')와 한국미술품연구소('대방동가마')가 문을 열고, 이후 근거지를 이천으로 옮기면서 고명순, 김완배, 지순택, 윤석준, 박수만,  현무남, 유근형 등 실력있는 도공들이 신둔면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천은 명실공히 연구와 창작이 함께 이루어지는 도자기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이천에서는 전통도자기와 생활도자기가 함께 생산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작품성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옛 도예가들이 가지고 있던 비법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우리 고유의 전통도자기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천도자기는 색깔이 은은하면서  곱고 섬세하여 다른 지방에서는 따를  수 없는 전통이 있고, 한국의 맛을 내는 도자기는 이천에 가야 구한다는 말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명성 있는 많은 작가들이 활동중입니다.

 현황
    해강 도자미술관은 도자기를 중점적으로 전시, 연구하는 미술관이다. 이곳은 해강부자가 평생 수집한 선조들의 도자 유물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1990년에 개관 하였다. 미술관1층에는 도자기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자문화실과 해강선생의 유품이 있는 해강기념실이 있고 2층에는 유물전시실이 있다. 도자문화실에 구비된 자료들은 도자기의 발달사와 제작방법 등 도자기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2층에서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흑유자기, 도편(陶片) 등과 같은 선조들의 유물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미술관에서는 상설전시와 함께 해마다 도자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특별전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옛가마터에 대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보고서, 도록 등을 발간하는 학술활동을하고 있다.또한 미술관의 경내에는 도자기를 제작하는 현장과 관련된 시설물이 있으며 도예교실에서는 도자기제작을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강좌도 개설하고 있다.

개관안내

박물관 전시시설은 전시관 본관 1동과 야외 조각공원, 유물관리실을 별도로 두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축으로 외관은 인도의 석굴사원에 착안하여 창이 많지만 큰 비중을 차지 하기 않게 하였고 건물의 중앙과 좌우에 둥근 계단을 설치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상징합니다. 지붕은 맞배식의 전통건축을 모방하면서도 용마루를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설계하여 독특한 외장을 하였습니다. 내부의장은 전통한옥의 방식을 추구하여 한지 창문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칠성목각탱(七星木刻幀)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은 옛부터 우리나라의 고유의 신앙형태였다. 얼한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이면서 치성광여래를중앙 본존으로한 칠성탱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존의 치성광여래와 함께 7보살, 28숙위 등 다양한 보살신중이 함께 등장하여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세계(佛世界)를 구성한다.  
이 목탱은 통도사 비로암의  칠성탱을 본(本)으로 하여 주변을 별자리 대신 연화문으로 돌려 복원한 작품이다.

분청사기의 역사

초기(발생기)
  제1기 - 태동기~1390년  고려 상감청자의 쇠퇴에 따른 , 암록색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미산.당전일대
제2기 - 발생기 ~1420년 고려 상감무늬의 변모. 분청 인화기법 발생기형,무늬,유태 재정비 조선적인 분위기를 형성광주군 초월면 쌍동리, 광주시 충효동, 경남 사천읍 구암리,신등면 장천리, 경북 상주군 화동면 어산리
중기(발전기) 1420~1480
  제1기 - 발전기 ~1450년 기법의 다양한 발전. 분청사기 특징이 뚜렷해지며 태토 밝아짐,백자생산, 세종 치세연간
제2기 - 성숙기 ~1480년 인화기법 대접무늬구도 완성 및 절정, 귀얄, 광주분원 설립, 청화백자 생산, 유태에 잡물이 섞여 막그릇화하는 경향이 있음충남 연기군 전동면 달전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
광주시 충효동,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경북 사천군 곤양면 송전 경북 월성군 현곡면 내태리.남사리, 고령군 기산동
 
 후기(쇠퇴기) 1480~1540
 
상감, 인화기법 쇠퇴, 철화 발생.발전(공주 학봉리 계룡산 기슭), 귀얄.담금기법 성행으로 백자화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경남 양산군 원동면 화제리, 웅산면 주남리,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 진양군 수곡면 효자리, 경북 고령군 사부동, 전북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아산면 용계리, 웅산면 주남리, 말기(소멸기)600  귀얄. 담금기법이 백자에 흡수 소멸
 

분청사기의 지역적 특징 (Local feature of 'Bunchongsaki')

분청사기의 특징에 따라 지역별로 3개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경기도/충청도를 제1군, 전라
도를 제2군, 경상도를 제3군으로 나눈다.
  제1군(경기도/충청도) ; 상감기법의 연당초무늬, 인화기법의 육각판무늬, 국화무늬가 주류.
귀얄과 담금기법 없이 바로 백자로 이행. 회백자에 백토분(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 철화기
법(충북 공주군 학봉리)
  제2군(전라도) ; 박지.음각(조화)기법 발달후 15세기 후반에 귀얄과 담금기법의 특징.
'내섬'글씨의 그릇(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제3군(경상도) ; 인화기법의 추상적인 분위기. 각종 관청이름 각인(경남 진양군 수곡면 효자
리,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경북 월성군 현곡면 내태리)
 

▣  분청사기의 발생 배경 (Background of 'Bunchongsaki')
  고려말의 혼란한 정치와 금속기의 사용 금지 정책에 따라 자기와 목기사용 증가,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한 도자 공예가 그 정형을 잃어 갔으며, 수요의 확산에 따라 도공들도 전국으로 흩어짐, 여러지방으로 흩어진 도공들이 소규모의 가마로 도기 제조. 상감 청자가 서서히 탈바꿈하여 어떤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제작. 민족자기의 성격을 띠면서 분청사기 태동 - 달라진 환경, 변화해간 기술자들의 의식구조, 수요층의 변화가 요인. 민족자기라 할 수 있는 것은 국가운영 체제의 관요로 운영되지 않고 도공의 자발적인 소규모 가마에 의해 제작이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 서민의 수요에 부응  분청사기의 절정
기가 민족문화를 꽃피운 세종치세 연간임
▣분청사기의 제작기법 (Technique of 'Bunchongsaki')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를 그릇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 고령인수부명 항아리 표면에 씌우는 백토 분장 기법(白土粉粧技法)과 분청사기만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무늬에 특징이 있다. .

백토 분장 기법이란 원하는 그릇을 만든 다음에 백토로 표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장식 방법에 따라서 다음의 일곱  종류로 나눈다.
 

1. 상감기법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 부분만을 긁어내고 이곳에 백토나 자토(?土)를 넣고 유약을 바른 뒤 구워내면 백토는 하얀 무늬로, 자토는 까만 무늬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다른 물질을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방법을 상감 기법이라고 하는데, 이 기법은 12세기 고려청자에서 처음 고안되어 15세기까지 애용되었다.
  상감기법은 금속 그릇에 금이나 은을 입사(入絲)하는 입사 기법이라든지 나전 칠기의 자개박이 같은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감 기법의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 청자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상감 기법에는 가는 선으로 무늬를 나타낸 선상감(線象嵌) 기법과 넓게 무늬를 새긴 면상감(面象嵌) 기법이 있는데, 특히 분청사기에는 면상감 기법에서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작품이 많이 전하고 있고 주목된다.

  2. 인화(印花)기법

꽃 모양의 도장을 찍는다고 하여 인화라고 했으나 모두 꽃 모양만을 찍는 것은 아니다.
이 기법은 도장을 찍어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주로 백토를 넣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볼 때는 상감 기법의 범주에 속하지만, 나타나는 무늬의 효과는 일정한 도장을 반복해서 찍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분위기를 유감없이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인화기법의 분청사기에는 관청 이름이나 지방 이름이 새겨진 예가 많이 있어서 그 당시 가장 상품(上品)의 그릇은 대개가 도장을 정성껏 찍은 인화 기법의 분청사기임을 알 수 있다.
 

3. 박지(剝地)기법

백토로 분장을 한 뒤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를 제외한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어 백색 무늬와 회색의 배경이 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세종 때에 활달하게 발전했으며 전남 고흥, 광주직할시, 전북 부안 등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현대인의 미감에도 잘 영합되는 박지 기법의 작품 가운데 제작 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은 분청 박지 연물고기무늬 고봉화상 뼈항아리이다.
 

4. 음각기법 또는 조화(調花)기법

백토분장뒤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조각. 백색바탕에 회색의 무늬를 새긴다.
무늬는 추상화된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독특한 자유분방함과 민족적인 맛이 있다.

  5. 철화기법

백토 분장을 한 뒤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기법이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등 다
양하여 서민들의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그 예로는 분청 철화 연지새물고기무늬 장군, 분청 철화 당초무늬 항아리등이 있다.
분청사기의 철화 기법은 충남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기슭에서 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명 '계룡산 분청사기'라고 하며,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서 많이 제작되었다.계룡산 기슭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발굴한 적이 있는데 (野守健, [계룡산록 도요지 조산보고], 1929.), 발굴 뒤에는 이 가마터들이 마구 방치되어서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어 오늘날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다.
 

6. 귀얄(풀비)기법

귀얄(넓고 거친 붓 또는 비)에 백토를 묻혀 그릇 표면을 바른다.
일회성의 풀비효과는 생동적인 운동감이 넘쳐 한국적인 재치를 느낄 수 있다.
 

7. 담금(덤벙)기법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서 백토 분장하는 기법으로, 덤벙 분청이라고도 하며 귀얄 기법과 달리 표면이 차분하다.
굽을 잡고 백토에 담가 분장하므로 굽에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려 재미있는 추상성이 있다.
 

분청사기의 문양 (Patterns of 'Bunchongsaki')
 
분청사기의 문양은 고려 말 청자에서 발전하였으나, 대단히 다양하고사실적이라 할 수 있으며, 처음부터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킨 것이었다.
 

백토분장과 태토색인 회색과의 대조로 문양을 나타내어 다채로운 안료의 선택이 없으며 문양자체가 소탈하면서 대담한 변형이 가능하였다.
분청사기의 문양은 선보다는 面의로 나타나는 문양이 主가 된다. 인화/상감/조화문 등은 작은 개체나 선이 결국 집단적으로 흰 면을 나타내며, 박지/면상감문 등은 물론 문양 자체가 면으로 구성된다.
주문양과 종속문으로 나눌 수 있으며 주문양은 사실의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 대담하게 생략. 변형하여 재구성한 것이고, 종속문은 이를 도식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분청의 문양은 고려문화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불교적인 문양이 많이 남아 있다.
크게 나누면 식물문과 동물문이 주제이며, 자연계의 전반을 개체 하나 하나의 성격을 잘 이해하여 나타내었다.

 식물문의 종류
 

버드나무, 연꽃, 모란당초, 모란, 연당초, 모란잎, 당초, 삼엽, 초화, 국화, 매화, 돌과 대나무인동초 등
 
 동물문의 종류
 
물고기, 새, 용, 개, 인물, 거북등, 어룡, 학 등 그외 구름, 누각문 등의 추상문이 있다.
 
생략이나 추상성있는 표현이 많아 자유스러움, 천진성, 소박한 순수성의 구김살 없는 표현을 보여줌으로 우리민족의 기질과 장인정신을 보여 주며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비해 한국적인 맛이 철저히 녹아 있어 민족자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의 분류 (Grouping of 'Bunchongsaki')
 
분청사기는 크게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와  백토분청계(白土粉靑系)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상감분청계에 속하는 것은 ①인화분청(印花粉靑)과 ②감화분청(嵌花粉靑)이고, 백토분청계에 속하는 것은 ③백토분청과 ④박지분청(剝地粉靑) ⑤철화분청(鐵畵粉靑) 등

① 인화분청

이것은 그릇의 표면을 작은 점들이나 작은 꽃무늬를 양각한 목제의 틀 등을 이용하여 도장을 찍듯이 찍어서 표면에 팬 무늬를 만든 후, 거기에 백토를 입히고 긁어내어 유약을 바른 후 구워내는 수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무늬를 일일이 손으로 새기거나 구상하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을 아낄 수가 있는 방법이다. 또한 틀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기 표면에 손쉽게 많은 무늬를 찍을 수가 있다.

인화분청사기는 관용(官用)으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관청용의 인화분청사기가 종종 없어지거나 몰래 사용(私用)으로 팔리는 경우가 많아 태종 17년(1417)에는 그릇에 관청명을 백토로 상감케 했다.
 
그릇에 상감된 관청 이름에는 공안부(恭安府), 경승부(敬承府), 인수부(仁壽府),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덕녕부(德寧府), 장흥고(張興庫) 등이 있었다.
예빈시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으로서 예빈시 명은 그릇에 백색상감으로 '예빈'이나 '예빈시' 혹은 '예빈시용'이라는 이름으로 새겨 넣어졌다.
  인수부 명은 많은 수의 그릇에서 보이고 있는데, 국화무늬를 주고한 인화무늬가 가득 찍혀 있는 그릇(대접)의 안쪽 바닥이나 옆면에 '고령(高靈)인수부'나 '언양(彦陽)인수부'라는 명문으로 찍혀 있다.
  내섬시는 태종 3년(1403)에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까지 있었던 관청이다. 내섬시 명이 찍힌 그릇은 대부분 사발이고 사발 전면에 인화무늬가 찍혀 있다.
'내섬시'라는 글자가 전부 찍힌 것도 있지만 대개는 '내섬'이라고만 찍혀 있는 경우가 많다.
  공안부는 정종(定宗)을 위해 만든 상왕부(上王府)다. 이 관청은 정종 2년(1400)에서 세종 2년(1420)까지 있었다. 공안부 명 사발에는 '공안부'라고 찍힌 것과 '공안'이라는 2글자만 찍힌 것이 있다.
  장흥고는 돗자리·종이 등 일반용품을 다루던 관청이다 장흥고에 납입하는 그릇엔 '장흥고'라는 명문이 찍히는데, 이 그릇들에는 '장(長)'이라는 외자만 찍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경주 장흥고' '예안 장흥고' '해주 장흥고' 등등의 지명이 붙여져 찍히는 경우가 많다.
 

② 감화분청(嵌花粉靑)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제작기법과 같이 분청사기에 무늬를 새겨 넣는 기법이다. 무늬는 학, 갈대, 모란, 연꽃, 물고기,용, 당초, 파초, 풀, 버들무늬 등이 쓰여졌다.  감화분청사기는 선(線) 상감과 면(面) 상감의 두 가지 수법이 사용되었는데, 상감의 선은 고려시대에 비해서 둔해졌고, 감화분청사기는 면 상감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김원룡(金元龍)은 이 감화분청에서 처음으로 조선적인 개혁과 신선미를 느낀다고 하면서 감화분청사기야말로 진실한 조선도자의 탄생이라고 했다.
 

③ 백토분청(白土粉靑)

 
백토분청 수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백토를 그릇 전면(全面)에 칠하기 위하여 그릇의 굽을 잡고 백토액에 그릇을 푹 담갔다가 꺼내는 방법이 그 한 가지 방법인데, 이때 백토가 그릇의 굽까지 전부 입혀지는 경우와 또는 굽에는 백토가 묻지 않
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그릇을 백토액에 담근 것을 '덤벙분청'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솔이나 귀얄에 백토를 묻혀서 그릇표면에 단숨에 빠르게 칠하는 방법이다. 이때 귀얄이 처음 닿는 그릇 표면은 백토가 진하게 묻게 마련이며, 끝으로 가면 백토가 연해지면서 갈라진 귀얄의 흔적이 그릇 표면에 남게 된다.
한번의 귀얄처리로 그릇 표면에는 변화 있는 백토자국이 칠해지는 것이다. 일부러 무엇인가를 도공들이 꾸미려 하지 않아도 그릇 표면에 나타나게 되는 이와 같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흔적이 이 방법의 독특한 매력이다. 이러한 방법은 귀얄분청 수법이라고 한다.
백토분청사기에는 사발종류가 많다. 이것들을 당시 관용기(官用器)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음식그릇이었다. 일반인의 음식그릇이 이렇게 멋진 고도의 미적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④ 박지분청(剝地粉靑)

그릇 표면에 백토를 전부 입힌 후, 그 위에 그리고자 하는 무늬를 그리고 나서 그림만 남기고 그림 이외의 부분은 칼로 긁어버리는 수법이다.
이렇게 하면 그림에만 백토가 칠해지게 되며 다른 부분은 백토가 묻지 않게 된다.
간혹 백토가 칠해진 그림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백토를 긁어낸 부분에철분을 바르는 경우도 있다. 역상감(逆象嵌) 기법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그림만 남기고 배경면을 넓게 파내는 방법과 단지 그림의 외형을 선으로만 가늘게 파나가는 방법이 있다.  백토 위에 선을 그어 무늬를 그리는 방법을 조화분청(彫花粉靑)이라고 하여 박지분청과 다른게 구분지어서 논하고 있기도 하지만, 김원룡이 일찍이 주장한 바 있듯이, 필자도 역시 박지분청 안에 면적 처리방법과 선적(線的) 처리방법을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사실 그릇 표면의 그림을 제외한 나머지 배경면을 긁어낸다고 해도 그림 내의 꽃잎형태나 잎맥 등은 선으로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는 선으로만 그림을 새겨나간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는 면적처리가 생기기 때문에 선적 처리방법과 면적 처리방법을 근본적으로는 같은 수법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박지분청사기에 쓰인 무늬에는 모란, 연화, 당초, 국화, 물고기무늬 등이 있다.
 

⑤ 철화분청(鐵畵粉靑)

그릇에 백토를 칠한 후 철사(鐵砂)로 무늬를 그리는 수법이다.
귀얄을 사용해서 그릇에 백토를 칠하기도 하고 백토액에 그릇을 담갔다 꺼내는 식으로 백토를 그릇에 입히기도 한다. 이렇게 입힌 백토 위에 철사로 물고기무늬나 새무늬, 당초무늬, 연꽃무늬, 인동(忍冬)무늬 등을 그려서 구워내면 철화분청사기가 되는 것이다.
그릇 표면의 백토색 바탕에 철사로 그린 무늬의 흑갈색이 강렬한 대비효과를 보이는 분청사
기다. 이 그릇들은 충청남도 계룡산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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