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에 대하여..
1. 한국의 도자기
2. 고려청자
3. 조선 백자
4. 조선의 분청사기
5. 분청사기의 특징
6. 분청사기의 분류
 

한국의 도자기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대략 일만년전에서 육천년전 경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7∼8천년 전부터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으로는 도기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와 중국, 베트남 정도 밖에 없었으며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은 그 조형이 독창적이고 양질의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특히 고려청자 조선 분청사기와 백자를 만든 도자공예 기술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만큼 빼어났다. 왕실과 같은 특정계층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도자기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인 생활용구로 제작한 도자기까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도자공예 문화유산은 한국인의 미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중국 일본도자기에 비하여 기형에 있어서는 단순하고 색에 있어서는 조용한 색을 선호한 우리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세계의 도자기 중에서도 뚜렷한 성격을 지니는 존재가 되었고, 그 하나하나가 지니는 미술적 가치 역시 높게 평가된다 또한 우리의 도자기는 도자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문화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도자기의 수도 매우 많고 신석기의 빗살무늬 질그릇부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남아있으며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도시나 시골등 전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만들어진 장소도 전국에 걸쳐있다
  중국 일본도자기에 비하여 기형에 있어서는 단순하고 색에 있어서는 조용한 색을 선호한 우리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세계의 도자기 중에서도 뚜렷한 성격을 지니는 존재가 되었고, 그 하나하나가 지니는 미술적 가치 역시 높게 평가된다 또한 우리의 도자기는 도자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문화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도자기의 수도 매우 많고 신석기의 빗살무늬 질그릇부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남아있으며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도시나 시골등 전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만들어진 장소도 전국에 걸쳐있다

고려청자

고려청자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옥(玉)과 관계되어 있다.
중국에서 옥은 군자(君子)를 상징하고 부귀와 죽은 후의 내세를 보장해주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중국인들이 옥을 지니고자 했는데 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옥의 생산은 한정되어있어서 그 가격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일단의 사람들이 흙으로 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도공들의 수많은 실험 끝에 3C 말에 청자가 만들어졌다.
 고려자기는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자기제작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고려자기의 출현은 이렇게 중국자기의 영향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고려는 곧 중국자기를 능가하는 독창적인 청자를 만들어 낼 수 있게된다.
 고려청자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때는 대략 10C경으로 초기청자는 그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녹갈색이 많이 나타난다. 11C∼12C 전성기 때에는 세계최고의 청자 예술품이 나온다. 비색청자 혹은 순청자라고 불리는 청자는 고요한 연못을 들여다보는 듯한 색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중국의 남송때 태평노인이 천하의 제일의 것들을 언급하는데 '고려비색(高麗秘色)이라 하여 이 시대의 청자를 가리키기도 했다.
12C~13C 에 걸쳐 상감청자가 나타한다. 삼강기법이란 그릇표면에 나타내고자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새긴 후 그 안을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구워낸 기법을 말한다. 이는 우리 나라가 최초로 도자기에 응용한 방법으로써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삼강청자는 구름이나 학등의 무늬가 많이 나타나는데 당시 불교를 믿고 불교적 선을 이루려는 고려인들의 마음의 세계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13C∼14C에 걸쳐 청자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의 청자는 도식화된 모양이 계속 반복되고 색도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백자

조선백자
  백자는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이다. 즉 백자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14C 후반 문익점에 의한 목화의 전례로 15C 이후사대부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흰옷을 즐겨 입게 되었다. 또한 유학이 전래되면서 검소 .질박. 결백함 등을 추구하게 되면서 백색을 선호하게 된다.이렇듯 백자가 가지고있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양반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에 청자에서 백자로 발달되었다. 15C 전반에는 백자의 생산이 거의 없었고 왕실에서 약간을 구워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변화가 일어나며 백자가 발달하게된다.16C에는 백자의 발달이 더욱 촉진되며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17C 초에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도 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재료를 수입해서 만드는 청화백자는 그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현재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다. 이때의 백자는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듯 어두운 회색 회백자의 백자로 거칠게 구워졌다. 17C후반에는 사회가 안정되어가며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사용되었으며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철화백자는 달 덩어리 같은 둥근 항아리에 굵은 필치로 자유롭게 그려진 구름과 용이 주로 등장하는 백자이다.
  18C 는 문화의 전성기로 백자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백색(乳白色), 설백색(雪白色)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검소하고 질박한 우리의 조상의 평범한 모습이며 그러한 평범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에 공감을 가지게 함을 느낄 수 있다.
 

분청사기

조선 분청사기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나타난 분청사기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오래 전부터 미술가들이 '분청자를 보라, 분청자에 해답이 있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분청사기를 말할 때는 '한국적' 이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분청사기는 우리민족의 독창성이 발휘된 조선특유의 자기로서 조선인들의 검박하고 담담한 자유로운 미의식이 낳은 자기이다. 형태가 수더분하고, 구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형태와 문양에서 박진감이 넘치며, 무엇에도 구애받을 것 없는 듯한 자유분방함이 있다.
  또한 분청자를 얘기할 때 현대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추상적인 문양과 익살스런 문양들은 마치 오늘날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백토로 분장된 15C의 분청사기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쓰는 그릇들이 백자로 바꾸어가자 일부는 민간의 소용품으로 바뀌게되면서 보다 자유분방한 형태의 분청사기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16C 중반에는 순청자와 막백자등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일본인들이 그것을 신과 같이 여겨 신기(神器)로까지 부르고 거기에 절을 하는 둥 애지중지 했다.  또한 이런 사발들이 조선에는 많다고 하여 보물을 찾으러가자 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도공, 가마 상실, 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백자화되며 사라지게 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를 그릇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 고령인수부명 항아리 표면에 씌우는 백토 분장 기법(白土粉粧技法)과 분청사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무늬에 있다.
  백토 분장 기법이란 원하는 그릇을 만든 다음에 백토로 표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장식 방법에 따라서 다음의 일곱  종류로 나눈다.
 첫째, 상감(象嵌) 기법이다.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 부분만을 긁어내고 이곳에 백토나 자토(?土)를 넣고 유약을 바른 뒤 구워내면 백토는 하얀 무늬로, 자토는 까만 무늬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다른 물질을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방법을 상감 기법이라고 하는데, 이 기법은 12세기 고려 청자에서 처음 고안되어 15세기까지 애용되었다. 상감 기법은 금속 그릇에 금이나 은을 입사(入絲)하는 입사 기법이라든지 나전 칠기의 자개박이 같은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감 기법의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 청자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분청 상감 포류수금무늬  편구대접 (사진1), 분청 상감 용무늬 항아리 (사진2) 등이 이 종류에 속한다. 상감 기법에는 가는 선으로 무늬를 나타낸 선상감(線象嵌) 기법과 넓게 무늬를 새긴 면상감(面象嵌) 기법이 있는데, 특히 분청사기에는 면상감 기법에서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작품이 많이 전하고 있고 주목된다 (사진3).
  둘째, 인화(印花) 기법이다. 꽃 모양의 도장을 찍는다고 하여 인화라고 했으나 모두 꽃 모양만을 찍는 것은 아니다. 이 기법은 도장을 찍어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주로 백토를 넣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볼 때는 상감 기법의 범주에 속하지만, 나타나는 무늬의 효과는 일정한 도장을 반복해서 찍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분위기를 유감없이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예로는 분청 인화 국화무늬병 (사진4)이 있다. 특히 인화기법의 분청사기에는 관청 이름이나 지방 이름이 새겨진 예 가 많이 있어서 그 당시 가장 상품(上品)의 그릇은 대개가 도장을 정성껏 찍은 인화 기법의 분청사기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박지(剝地) 기법이다. 백토로 분장을 한 뒤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무늬를 제외한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어 백색 무늬와 회색의 배경이 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사진7). 이 기법은 세종 때에 활달하게 발전했으며 전남 고흥, 광주직할시, 전북 부안 등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현대인의 미감에도 잘 영합되는 박지 기법의 작품 가운데 제작 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은 분청 박지 연물고기무늬 고봉화상 뼈항아리 (사진8)이다.
  넷째, 음각(陰刻) 기법이다. 또는 조화(彫花) 기법이라고도 하는 이 기법은 백토 분장 뒤에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조각을 하면 백색 바탕에 회색의 무늬가 새겨지는데 (사진9), 이때에 무늬는 추상화 된 능숙한 솜씨를  보여 주는 예가 많다 (사진10).
 다섯째, 철화(鐵畵) 기법이다. 백토 분장을 한 뒤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기법이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등 다양하여 서민들의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예로는 분청 철화 연지새물고기무늬 장군 (사진11), 분청 철화 당초무늬 항아리 (사진12) 등이 있다. 분청사기의 철화 기법은 충남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기슭에서 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명 '계룡산 분청사기'라고 하며,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서 많이 제작되었다. 계룡산 기슭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발굴한 적이 있는데 (野守健, [계룡산록 도요지 조산보고], 1929.), 발굴 뒤에는 이 가마터들이 마구 방치되어서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어 오늘날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다. 여섯째, 귀얄 기법이다. 귀얄이란 일종의 풀비와 유사한 것으로 이 도구에 백토를 묻혀 그릇 표면을 바른다. 그러므로 일회성의 풀비 효과는 생동적인 운동감이 넘친다 .
  일곱째, 담금(덤벙) 분장 기법이다.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 분장하므로 이 종류의 분청사기를 덤벙 분청이라고도 한다. 이 기법은 귀얄과 같은 붓 자국이 없어서 표면이 차분하다. 백토가 두껍게 씌워지면 표면이 거의 백자와 같이 되므로 이 기법의 그릇들은 분청사기 말기에 많이 제작되었으리라고 본다. 대접이나 접시의 경우에는 손으로 굽을 잡아 그릇을 거꾸로 백토물에 담갔다 꺼내므로 굽 언저리에는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린 곳만 있게 되어 매우 재미있는 추상성을 보인다. 이 종류에는 분청 덤벙 분장 제기 같은 것이 있다.

  이상 일곱 종류의 분장 기법 외에 분청사기의 또 다른 특징은 무늬이다. 무늬는 대범한 모란당초, 모란, 연꽃, 풀과 꽃, 버드나무, 물고기 같은 것이 있고 때로는 이들이 생략되거나 추상화되어 구김살 없는 표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표현의 기량은 구애받는 것이 없는 자유스러움, 천진성, 소박한 순수성 등의 제작 태도에 기인한 것이며, 바로 이점이 분청사기를 만든 우리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쉼을 느끼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대 도자기 도조(陶彫)로 전환하여 순수 예술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요즈음, 500여 년 전의 분청사기는 비록 일상 용기로서의 항아리, 병, 사발, 접시 같은 평범한 형태이지만 우리들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이유는 철저한 장인(匠人) 정신에 바탕을 둔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분청사기 분류

  분청사기는 우리 민족의 독창성이 자기 부문에서 발휘되어 나타난 조선 특유의 자기로서 조선인들의 검박하고 담담하고 자유로운 미의식이 낳은 자기다. 분청사기는 고려자기와 같은 매끈한 세련미와 귀족적인 위엄 대신에 보다 구수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감도는 열려진 미의식이 담긴 자기인 것이다.
  분청사기는 크게 나누어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와 백토분청게(白土粉靑系)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상감분청계에 속하는 것은 ①인화분청(印花粉靑)과 ②감화분청(嵌花粉靑)이고, 백토분청계에 속하는 것은 ③백토분청과 ④박지분청(剝地粉靑) ⑤철화분청(鐵畵粉靑) 등이다.
 
  ①인화분청: 이것은 그릇의 표면을 작은 점들이나 작은 꽃무늬를 양각한 목제의 틀 등을 이용하여 도장을 찍듯이 찍어서 표면에 팬 무늬를 만든 후, 거기에 백토를 입히고 긁어내어 유약을 바른 후 구워내는 수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무늬를 일일이 손으로 새기거나 구상하는 데 드는 노력과 시간을 아낄 수가 있는 방법이다. 또한 틀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기 표면에 손쉽게 많은 무늬를 찍을 수가 있다.
  인화분청사기는 관용(官用)으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관청용의 인화분청사기가 종종 없어지거나 몰래 사용(私用)으로 팔리는 경우가 많아 태종 17년(1417)에는 그릇에 관청명을 백토로 상감케 했다. 그릇에 상감된 관청 이름에는 안부(恭安府), 경승부(敬承府), 인수부(仁壽府),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덕녕부(德寧府), 장흥고(張興庫) 등이 있었다.
  예빈시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으로서 에빈시 명은 그릇에 백색상감으로 '예빈'이나 '예빈시' 혹은 '예빈시용'이라는 이름으로 새겨 넣어졌다. 인수부 명은 많은 수의 그릇에서 보이고 있는데, 국화무늬를 주고한 인화무늬가 가득 찍혀 있는 그릇(대접)의 안쪽 바닥이나 옆면에 '고령(高靈)인수부'나 '언양(彦陽)인수부'라는 명문으로 찍혀 있다. 내섬시는 태종 3년(1403)에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까지 있었던 관청이다. 내섬시 명이 찍힌 그릇은 대부분 사발이고 사발 전면에 인화무늬가 찍혀 있다. '내섬시'라는 글자가 전부 찍힌 것도 있지만 대개는 '내섬'이라고만 찍혀 있는 경우가 많다. 공안부는 정종(定宗)을 위해 만든 상왕부(上王府)다. 이 관청은 정종 2년(1400)에서 세종 2년(1420)까지 있었다. 공안부 명 사발에는 '공안부'라고 찍힌 것과 '공안'이라는 2글자만 찍힌 것이 있다. 장흥고는 돗자리·종이 등 일반용품을 다루던 관청이다. 장흥고에 납입하는 그릇엔 '장흥고'라는 명문이 찍히는데, 이 그릇들에는 '장(長)'이라는 외자만 찍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경주 장흥고' '예안 장흥고' '해주 장흥고' 등등의 지명이 붙여져 찍히는 경우가 많다.
 
  ②감화분청(嵌花粉靑):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제작기법과 같이 분청사기에 무늬를 새겨 넣는 기법이다. 무늬는 학, 갈대, 모란, 연꽃, 물고기,용, 당초, 파초, 풀, 버들무늬 등이 쓰여졌다.
  감화분청사기는 선(線) 상감과 면(面) 상감의 두 가지 수법이 사용되었는데, 상감의 선은 고려시대에 비해서 둔해졌고, 감화분청사기는 면 상감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김원룡(金元龍)은 이 감화분청에서 처음으로 조선적인 개혁과 신선미를 느낀다고 하면서 감화분청사기야말로 진실한 조선도자의 탄생이라고 했다.
 
   ③백토분청(白土粉靑): 백토분청 수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백토를 그릇 전면(全面)에 칠하기 위하여 그릇의 굽을 잡고 백토액에 그릇을 푹 담갔다가 꺼내는 방법이 그 한 가지 방법인데, 이때 백토가 그릇의 굽까지 전부 입혀지는 경우와 또는 굽에는 백토가 묻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그릇을 빅토액에 담근 것을 '덤벙분청'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솔이나 귀얄에 백토를 묻혀서 그릇표면에 단숨에 빠르게 칠하는 방법이다. 이때 귀얄이 처음 닿는 그릇 표면은 백토가 진하게 묻게 마련이며, 끝으로 가면 백토가 연해지면서 갈라진 귀얄의 흔적이 그릇 표면에 남게 된다. 한 번의 귀얄처리로 그릇 표면에는 변화 있는 백토자국이 칠해지는 것이다. 일부러 무엇인가를 도공들이 꾸미려 하지 않아도 그릇 표면에 나타나게 되는 이와 같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흔적이 이 방법의 독특한 매력이다. 이러한 방법은 귀얄분청 수법이라고 한다.
  백토분청사기에는 사발종류가 많다. 이것들을 당시 관용기(官用器)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음식그릇이었다. 일반인의 음식그릇이 이렇게 멋진 고도의 미적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④박지분청(剝地粉靑): 그릇 표면에 백토를 전부 입힌 후, 그 위에 그리고자 하는 무늬를 그리고 나서 그림만 남기고 그림 이외의 부분은 칼로 긁어버리는 수법이다. 이렇게 하면 그림에만 백토가 칠해지게 되며 다른 부분은 백토가 묻지 않게 된다.
  간호 백토가 칠해진 그림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백토를 긁어낸 부분에 철분을 바르는 경우도 있다. 역상감(逆象嵌) 기법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그림만 남기고 배경면을 넓게 파내는 방법과 단지 그림의 외형을 선으로만 가늘게 파나가는 방법이 있다.
  백토 위에 선을 그어 무늬를 그리는 방법을 조화분청(彫花粉靑)이라고 하여 박지분청과 다른게 구분지어서 논하고 있기도 하지만, 김원룡이 일찍이 주장한 바 있듯이, 필자도 역시 박지분청 안에 면적 처리방법과 선적(線的) 처리방법을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사실 그릇 표면의 그림을 제외한 나머지 배경면을 긁어낸다고 해도 그림 내의 꽃잎형태나 잎맥 등은 선으로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는 선으로만 그림을 새겨나간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는 면적처리가 생기기 때문에 선적 처리방법과 면적 처리방법을 근본적으로는 같은 수법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박지분청사기에 쓰인 무늬에는 모란, 연화, 당초, 국화, 물고기무늬 등이 있다.
  ⑤철화분청(鐵畵粉靑): 그릇에 백토를 칠한 후 철사(鐵砂)로 무늬를 그리는 수법이다. 귀얄을 사용해서 그릇에 백토를 칠하기도 하고 백토액에 그릇을 담갔다 꺼내는 식으로 백토를 그릇에 입히기도 한다.
  이렇게 입힌 백토 위에 철사로 물고기무늬나 새무늬, 당초무늬, 연꽃무늬, 인동(忍冬)무늬 등을 그려서 구워내면 철화분청사기가 되는 것이다. 그릇 표면의 백토색 바탕에 철사로 그린 무늬의 흑갈색이 강렬한 대비효과를 보이는 분청사기다. 이 그릇들은 충청남도 계룡산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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