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에 대하여....
 

 

  성곽의 개설
  역사기록상 가장 자주 먼저 나타나는 글은 성이라는 낱말이다. 우리 나라 지명에는 성이란 글을 사용한 곳이 많은데 이는 현존하는 성이 있던가 아니면 과거 성이 있었던 지명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성곽을 많이 축조하고 축조기술도 뛰어나서 성곽의 나라라고 불려졌다. 성곽을 이용하는 성곽전술이 발달되어 외적을 물리침으로써 오늘날까지 국가를 잘 보전하여 왔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성곽의 수, 양에 비해 연구가 미흡한 실정인데 단순한 과거 유적으로서 뿐만 아니고 오늘날의 국방시설과도 연관을 갖고 활발한 조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성곽의 정의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집단의 공동목적을 갖고 거주주체의 일정한 공동활동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건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군사적이란 뜻은 성곽이 지역 방어 국가 방어 등 각종 군사방어 목적을 갖는 것이 으뜸이다. 한 가정의 울타리나 목장과는 다르다. 행정적이란 성곽은 군사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일부는 행정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 예로 국가통치를 위해 왕이 거주하고 있는 주변과 읍치를 위해 성을 구축하는 것은 반드시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축조하였다고 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이는 통치를 위한 권위적인 요소와 행정적 편의를 함께 하는 합목적적인 것으로 보인다. 집단의 공동목적이란 개인이 아닌 집단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사사로운 울타리 구획과는 구별된다. 거주주체에 의해는 자연지형이 아무리 천연요새와 같다하더라고 이를 성곽이라 부르지 않듯이 반드시 사람 즉 인공에 의해 최소한 일부 축조되어야 한다. 일정한 공동활동공간을 확보하고는 성곽이란 성벽으로 거주주체인 요원의 활동을 보장하는 즉 수용공간을 보유하여 방어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면적 즉 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성벽으로 완전히 둘리지 않아도 적에 대치할 수 있는 일정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것은 돌무더기, 흙무덤, 개인분묘등 이 성곽이 아니듯 부분적으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더라도 일정공간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조성하든가 인공구조물을 쌓아 상호 연결시켜 방어력을 제공하는 구조물이어야 한다. 전통 건조물이란 종전까지는 성곽이 당시에 필요한 군사방어시설물이었으나 현재는 그 기능이 끝나고 단순히 문화유적으로서의 기능만 간주되는 입장에서 이제까지 성곽정의에서는 시간의 한계성을 부여하지 않았었다. 오늘날 휴전선과 군사방어시설물을 성곽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과거 즉 조선말까지 그 기능이 살아있었던 당시까지 축조된 성곽을 말하게 됨으로 전통건조물이라고 불려져야 될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기원과 발달
  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 조선 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인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삼한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적인 성과로는 대체로 서기 2세기 이후에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곽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성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발견된 예가 있다 그러나 철기 문화를 누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이나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단위로 한 성읍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삼국의 성곽 시설로는 대부분 간단한 목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본격적인 석축에 의한 성곽은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 이후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목책은 나무 기둥을 엮어 세워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성이었지만 삼국시대에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에서도 목책성이 주요 방어시설로 활용되었다. 토성은 흙을 다져 넣어가며 쌓는 판축법과 토성이 축조될 곳의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쌓아올리는 삭토법이 있는데 판축식은 주로 평야에서 삭토식은 산등성이에서 사용되었다. 목책성이나 토성, 석성 등은 그 출현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능에 따라 혼재해왔으며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벽돌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정조때 수원성 축성에서 부분적으로 채택되었을 뿐 우리 나의 성곽은 석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의 성곽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발생 과정도 산성이 다른 형식의 성곽보다 먼저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지세가 산악으로 중첩되어있어 자연지세의 험고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주로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축 또는 석심 토축의 토성을 쌓다가 후기로 갈수록 성곽의 규모도 커지고 재료도 대개 석축으로 바뀌게 된다. 또 처음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부근에 태를 두른 듯한 테뫼형이 많으나 후기에 오면 골짜기를 둘러싸는 포곡형이 주류를 이룬다. 테뫼형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산성에서 채택되고 있는데 높은 산봉우리에 쌓는 경우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평야에 가까운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산성의 둘레는 4백내지 6백 미터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백미 터가 넘는 큰 것도 있다. 성벽을 토축으로 한 것이 많으며 또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쌓은 것을 볼 수 있다. 포곡형은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한 산성을 말하는데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내의 계류는 평지에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를 통해 밖으로 흘려보내는데 성문도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는 수가 많다.
 성안의 가장 높은 곳에 장대를 만들어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평탄한 지형을 골라 군창등의 건물을 세웠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축으로 쌓았으며 자연석 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석축의 구조적인 공법으로는 현축과 내탁의 두 가지 축성법이 있는데 전자는 성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까운 석벽으로 쌓은 것을 말하며, 후자는 바깥쪽만 석축을 이루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밋밋하게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산성은 대개 내탁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의 산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내탁법의 산성에서 성안 사람들이 성곽을 방어하기에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석축 방식은 이른바 물림 쌓기란 공법으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 쌓아 전체적으로 성벽이 15도 가량의 경사를 유지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견고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한 공법상의 배려이다.
 삼국시대의 축성 술은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져 규수지방과 대마도에는 조선식 산성이란 이름으로 많이 남아 있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 기술자들은 7세기 전반부터 후반에 걸쳐 대규모의 조선식 산성을 쌓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재부 방위를 위해 축조한 대얏성, 기진성과 대마도의 금전성을 들 수 있다.
 
성곽의 종류와 분류
 성곽의 분류는 거주주체, 지형, 목적에 따라 분류해 볼 수 있다.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는 축성시 누구를 위해 조성하였느냐에 따라 평시 거주 여부에 따라 도성, 궁성, 행재성, 읍성으로 분류해 볼 수 있으며 기타로 왜인들이 지은 왜성이나 우리 선조가 일본에 건너가 지은 한식 산성 등이 있다. 목적에 따른 분류로서는 행적 적인 목적과 군사적인 목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형에 따른 분류로서는 어느 지형에 지었느냐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지와 산성이 혼합된 평산성등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기준에 따라 분류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성곽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 중에서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가 가장 일반적인 분류의 기준으로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지형이나 목적에따른 분류는 제외하고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도성
 도성은 왕이 평시 거처하는 궁성을 포함하여 한 국가 권력의 상징인 왕이 평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에 내곽인 궁성과 외곽인 내곽을 갖춘 형태를 말한다. 중국의 도성은 궁성을 중심으로 평지에 바둑판 같이 종횡으로 도로를 내어 도시의 외곽에 성벽을 둘렀다. 우리 나라 도성은 삼국초기부터 발달되었는데 중국과는 달리 평지에 조성된 중국식이라기 보다 산성에서 발전된 방식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형여건에 맞게 민가와 관청건물을 수용하고 자연지세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방어력도 높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 이전의 고대부족국가시대에는 도성이란 개념이 형성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도성은 절대권력의 왕이 왕권을 강화한 시기부터 도성으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궁성
 봉건사회에서 절대권자인 왕이 거처하며 통치하는 곳에는 궁궐을 짓고 필요한 관청건물이 축조된다. 이를 중심으로 성벽이나 담장으로 둘러싸는데 이를 통틀어 궁성이라 한다. 도성 내에는 왕이 있는 궁궐을 비롯하여 백성들과 행정관청을 두루 갖는 지역을 말하는데 도성내의 도성을 궁성이라 할 수 있다. 궁성은 도성이 축조되지 않는 곳에도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도성이 축조된 내에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궁성은 여러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왕이 거처한다 하여 왕성이라 하기도 하고 황제인 경우는 황성이라고 불리웠다.
 
행재성
 행재성은 재성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절대왕권시대의 왕이 거처하는 성을 재성이라 하는데 통상도성내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행재성은 평상시에는 상주하지 않으나 국방상 행정상 중요한 지점에 국왕이 임시로 가서 있는 성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이경의 궁성을 말하는데 고려시대 수도 개경이외에 국방 행정상 중요한 남경 서경 등지에 궁성을 축조해 놓은 성을 말한다. 한편 수원성의 경우는 읍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읍치인 수원성을 쌓는다. 왕은 임시로 행차하여 머물기도 하였다.
 
낙안읍성
읍성
 읍성은 거주주체가 왕이 아니고 군, 현, 주민의 보호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한 성이다. 도성과 읍성에 대한 구분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을 도라 하고 없으면 읍이라고 하여 이러한 고을에 방형으로 시설된 것을 성곽이라 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도성과 읍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읍성 형식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읍성이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부족국가시대 집단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책을 읍성의 형태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통일신라시대의 주, 군, 현에 성을 축조하였는데 오늘날의 읍성형태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현존 읍성의 성격을 갖춘 성곽의 형태는 여말 왜구에 대비하여 연해 위주에 읍성을 축조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보여진다.
 

성곽의 구성요소
 
성문
  성문은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전세가 유리할 때에는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기도 하는 통로이다. 이러한 성문은 통행에 편리한 곳에 만들어 놓아 출입용 구조물로서의 역할이 그 첫째이다. 성문은 주로 사람의 출입은 물론 항쟁에 필요한 물자를 운송하기 편리한 위치를 택하여 설치했기 때문에 적의 접근도 용이하고 적의 주공격 목표가 되기 쉽다. 이와 같은 취역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성문지역에는 여러 보완시설이나 보호시설을 하였다. 성문을 외부에서 보기에 장중하고 복잡한 구조를 하기도 하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 적대 등의 시설을 하거나 육축을 축조하여 그 위에 문루를 높게 세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되어 군사의 지휘, 사격 등에 유리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성문 좌우의 성벽은 일반 성벽과는 달리 성벽을 두껍게 한다든지 성벽 돌을 특별히 크게 하거나 가공정도도 달리한 무사석축을 하였다. 성문은 성곽의 축조시기, 재료, 목적, 위치, 규모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여러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성문은 초기 목책에서는 가운데를 비워두고 출입하거나 임시구조물을 걸친 원시적인 형태에서 토루의 일부를 절단 또는 축성하지 않거나 엇비켜 중첩해 두는 형태등 차츰 성문의 형식이 발전해 문루를 세우고 성문의 각종 부대시설을 구비하여 오늘날의 위엄을 갖춘 훌륭한 성문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도읍성은 일상생활의 불편을 덜기 위해 성내 외의 도로망 등을 고려 통행성이 중시되었다. 한편 성문은 축성목적에 따라 정문, 간문, 암문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문이라 하면 정문을 말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성곽의 형식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건조물은 바로 성문이다. 성문의 수는 성곽의 규모, 축성목적, 지형등 제요소에 의해 정해졌는데 기본적으로 4개를 두었다. 방향도 동서남북으로 하여 가능하면 간격도 균등히 하여 출입의 불편을 줄이고자 하였다. 도성의 경우 그 규모가 말해주듯 4대문 외에도 소문, 간문 등을 두어 통행의 불편을 덜었다.
 성문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문의 크기보다 작은 암문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이 암문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로 출입문 위에 문루를 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육축이나 외부에서 식별되는 제시설도 하지 않았다. 성벽의 일부를 이용하게 됨으로 겉으로 보아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였다. 이런 암문은 아군측에서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암문은 일반성문에 비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암문의 수는 반드시 성곽의 규모에 따르지 않았으나 성곽의 규모가 큰 경우 암문도 많다. 평지 성보다는 산성의 경우 암문의 설치가 많은데 이는 산성의 경우 암문설치에 더욱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곽에는 배수를 위한 시설이 있는데 이는 규모가 크고 문의 형식을 갖춘 경우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적은 경우 수구라 한다. 성곽이 위치하고 있는 일정공간은 성벽으로 둘러 처져 있기 때문에 성내에서 발생하는 우수를 비롯 제반 물 처리를 성벽 일부를 통하여 배수하고 있다. 성벽의 일부를 개구시켜 설치함에 따라 적절히 배수가 되지 못할 경우 성벽보전에 가장 큰 취약점이 된다. 성곽에서는 배수가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수문 또는 수구가 있는데 그 크기는 집수면적에 따른 통수단면에 따랐다. 집수면적이 적은 경우는 성돌한개를 뺀 형식에서 규모가 큰 곳은 교량과 같이 연속홍예를 틀어 만들기도 하였다. 수문의 경우 성벽일부가 노출 개방됨에 따라 방어력에 상당한 취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벽위로 폭포처럼 배수하기도 하며 또는 성벽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배수하기도 하며 수원성의 경우처럼 넓은 배수구를 갖지만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배수지점을 낮게 하여 배수구를 통해 들어와서는 공격이 어렵지만 위에서는 쉬운 형태로 수구를 만들기도 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는 위에서 말했듯이 옹성과 적대가 있는데 옹성이란 성문을 밖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을 말한다. 이러한 옹성은 적이 성문 바로 아래에 숨어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또는 적의 화기로 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러한 옹성외에도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라고 불리는 것을 성문 양쪽에 설치하기도 한다. 적대란 성문좌우에 설치한 치를 특별히 적대라 하여 체성의 치와 구분하였는데 이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주변가까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방어시설물의 하나인 것이다. 적대는 그 기능이 옹성과 관련이 많으나 옹성의 유무에는 관계없이 설치한 듯 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과 적대 외에 오성지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성문을 적의 화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바로 위에 물이 나오는 구멍을 설치한 것이다.
 
성벽
 성벽에서 근본을 이루는 것이 체성인데 성곽의 몸통부분에 해당된다. 성벽의 높이란 체성의 높이를 두고 말한다. 우리 나라의 성곽에서는 성벽의 성격을 중시하는 성제여서 성벽이 성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한편 우리 나라는 성곽의 위벽 형식이 단곽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성벽에서의 방어력이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성벽의 어느 일부가 뚫리게 되면 뒤통수를 얻어맞게 되는 격이 되어 무용지물이 될 뿐아니라 오히려 장애물 역할을 하는 수도 있게된다. 이러한 이유로 성곽에 둘러친 성벽을 높고 튼튼히 축조함을 목표로 하였다. 성벽자체가 가장 중요한 방어력을 제공하는 수단이 되었는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체성위에 또는 주변에 각종 부대시설을 설치하여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기도 하였다. 성벽에 따른 각종 시설들에는 여장, 총안, 현안, 치, 각루, 공심돈, 용도, 해자등이 있다.
 체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여장이라 한다. 여장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위나암성, 요동성총의 여장형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초기부터 여장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장의 형태는 여러 형식이 보인다. 이는 여장에 총안 까지 갖춘 시설을 하여 방어력을 높인 듯 한데 석성의 대부분은 여장을 설치하였다고 보나 토성의 경우는 여장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재료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여장은 체성위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체성보다도 그 유구가 적다. 성벽 위에서 여담을 이용 적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여담에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을 말한다. 여담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있는데 원거리를 관측하고 사격을 할 수 있는 원총안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근촌안으로 급경사로 뚫었다. 여장의 한 구간은 타와 타구를 합한 것으로 타구 설치 역시 총안과 같은 기능이었다. 타에는 보통 원총안 2개소, 근촌안 1개소를 뚫어 타 한 구간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을 동시에 구비하여 방어능력을 높였다. 총안의 체로 타구는 높이가 가슴정도이고 폭은 5치 정도인데 그 안팎 옆을 깎아서 좌우에서 활을 쏘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현안은 성벽의 외벽 면을 수직에 가깝게 꿇어 성벽 가까이 온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적이 성벽에 완전히 밀착하면 성위에서 발견하여 퇴치가 어려워 14세기 말경에 창안된 것으로 보며 우리 나라 성벽에서는 의주성에서 부터 채용되었다. 성벽에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전투시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 시켜 장방형으로 내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치는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치성, 곡성, 성두등이 있다. 치위에 누각의 유무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누각이 있는 경우 포루, 적루, 포사라하며 치에 포를 설치하는 경우에 포루, 석루라 한다.
 각루는성곽에서 성벽에 부착된 치의 일종으로 모서리 부분에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것을 각루라 한다. 방형 성에서는 모퉁이에 설치하였고 산성등 자연지세를 이용한 경우에는 지형상 돌출 되어 관측과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각루는 건물이 이었는데 대부분 지붕은 기와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루를 지어 놓음으로 외관을 돋구는 역할도 했을 것이나 유사시 전투지휘 보조처로도 이용되었다. 성벽에 설치한 돈대의 하나로 각루, 포루가 위치한 곳과 같은 치의 자리에 놓다랗게 설치한 시설물인데 내부가 비어있어 공심돈이라 한다. 공심돈은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서북, 동북, 남공심돈 3개소가 있다. 동북공심돈은 원형으로 되어있고 서북, 남 공심돈은 방형으로 되어있다.
 성벽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좁게 성벽을 성외부로 길게 내뻗혀 양쪽에 여장을 쌓는 성도를 말한다. 용도는 본 성벽과 같은 구조로 하였다. 용도가 설치된 지형은 성곽의 지형여건상 방어에 필요한 지형이나 전체를 감싸기 곤란한 지형이다. 해안성, 산성등 요철이 심한 지형을 이용한 성에서 넓은 정면의 성벽을 지키기에는 훈련된 병사가 많이 필요하는 경우에 조성되었다. 성곽은 잘 지키기 위해 적정한 방어면적을 갖는 위곽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형상 꼭 확보해야 되는 곳을 전부 둘러싸지는 못하더라도 방어상 꼭 필요한 지점만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인 성곽시설의 하나이다.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이다. 해자는 적의 기동에 장애를 주는 하천, 바다 등을 이용한 자연해자와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낸 인공해자로 구별된다. 해자는 성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는 경우도 있다. 자연해자 이용이 곤란한 지형은 인공적으로 설치하였는데 해자 설치는 성벽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넓고 길게 파는 것이 좋은데 여기서 발생되는 흙은 토루 성벽내탁의 축조재료로 사용하므로 공력을 절감하였다. 해자를 설치함으로 성벽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방어력도 증가되었다. 우리 나라는 산성이 전통적으로 많은 바 이러한 산성에서는 지형 여건상 물을 채우지 않는 건호가 많았고 사면을 완전히 둘리지 않고 방어상 중요지점에만 설치한 경우도 있었다. 성내의 내황의 역할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성내의 고지에서 성벽에 흘러드는 물을 이 곳에서 막아 성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이고 성외의 해자는 방어력 증진목적 외에 성기저부에서 일정간격을 띄어 설치하므로 성벽보호는 물론 성기저부부분의 침수를 막고 지하수위를 낮추게 하는 역할을 하여 지반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성내시설
 성내의 시설에는 성곽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다. 행정적 성격이 많은 도성과 읍성의 경우는 산성 류에 비해 성내시설이 다양하다. 도성인 경우 통치권의 핵심인 왕이 거처하는 궁성을 비롯 한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중요 시설이 성내에 들어와 있었다. 읍성의 경우 주민일부까지 수용하고 있는데 산성의 경우는 유사시 입보항쟁할 수 있을 최소한의 시설인 우물, 창고건물 등을 준비해 두었다.
 외침을 당하여 입성한 경우 가장 중요한 필수요소의 하나가 음료이다. 일정기간 농성을 위해 병사의 식수뿐 아니고 군마 또는 일정기간의 취사, 세탁 등에 필요한 물을 성내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모든 성에는 성곽이 위치하고 있는 내부에 샘, 우물, 저수지등이 있다. 성의 입지 조건에 따라 수원이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성내에 계곡 물을 이용하던가 우수 등을 활용하기 위해 물이 고일 수 있는 지점에는 못을 집중적으로 조성하여 물을 확보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확보하였다. 전투시 군사의 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장대라고 한다. 장대는 모든 성에 다 둔 것은 아니고 성곽의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곽에 장대를 둠으로 유리한 지형적 조건이 있는 곳에 설치하였다. 장대는 성내 지형중 가장 높고 지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는데 성내 면적이 넓고 한 곳에서 지휘하기 곤란한 지형에서는 지휘에 편리한 곳에 장대를 추가로 두어 방향에 따라 이름을 불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는 성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대의 위치는 성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형에 따라 성벽에 붙여 설치하기도 하였다.
 성곽을 중심으로한 성내외의 도로망은 성문을 통해서만 도로의 발전이 가능하였는데 행정적인 성격을 많이 띈 도성, 읍성에서는 잘 발달되었고 산성의 경우 성문에 이르는 제한된 도로가 고작이었다. 한나라 수도의 도로망은 도성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도로망의 발달은 성곽의 방어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봉수대란 것이 있다. 봉수의 의미는 원래 봉화의 뜻과 같으며 밤에 봉화를 올려 연락하는 것을 말하고 수는 낮에 연기를 올려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즉 봉수란 주야간의 의사표시인 전보의 총칭이이다. 봉수대는 봉수제에 따라 적절한 지형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성곽의 점정위치와 일치하지 않으나 적도가 출현했을 때 조기에 알려주고 대비하는 기구로 봉수제 자체도 성내에 두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봉수대 자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설을 하였다. 봉수대외에도 성곽내부 시설에는 노대란 것이 존재한다. 노대는 활을 쏘기위한 대로 성벽보다 한단 높게 쌓은 총포 공격의 장소로 수원성에서 동북노대, 서노대등 2개소가 보인다. 동북노대는 성벽에서 치와 같이 마제형으로 10미터 정도 튀어나오게 하고 단도 2미터정도 성벽보다 높게 한 시설로 건물은 없고 여장을 설치하여 적공격과 관측에 치보다 유리한 시설이다.
 

시대별 성곽의 특징

고구려의 성곽
  고구려는 북방에서 여러 민족들과 다투면서 영토와 국력을 확장하고 고대국가로 성장한 이후 중국의 수당과 세력을 겨루었으므로 일찍부터 축성술이 발달 하였고 성곽전에도 뛰어났다. 초기에 도읍을 산 위로 정하였던 것도 외침의 위협 때문이었다.
  초기 고구려의 성곽은 대부분 만주 지방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의 이들 산성은 성돌을 정연히 쌓아 올린 석루(石壘)로서 산정부터 골짜기에 걸쳐 고리 모양으로 돌아나갔는데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산성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구려 산성은 대체로 삼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 완만하게 경사가 낮아진 곳에 쌓았으며 성벽은 수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고구려 성으로 밝혀진 것은 만주 집안(輯案)의 위나암성, 환인산성, 길림의 용담산성, 용강의 황룡산성, 평산의 태백산성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남해에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펴 한강 이남까지 진출했을 때 축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단양의 온달성과 음성의 방이산성이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백제의 성곽
  백제는 두번이나 천도를 해야 하는 불운 속에서 삼국 가운데에는 가장 많은 성을 쌓았다. 또한 토성과 목척을 많이 설치하였는데 이는 백제의 영토가 산성보다 평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축성은 왕도(王都)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위례성 시대에는 한강유역에 말갈과 고구려를 방비하는 축성을 많이 했고 웅진시대에는 공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고구려와 신라를 막기위해 성을 쌓았다.
  사비시대에는 부산소위에 왕국을 둘어싼 토성인 부소산성을 쌓고 외곽으로 반달모양의 나성을 만들었으며 정연한 도성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초기 백제 시대의 것으로는 한경변의 풍납리토성, 몽촌토성과 광주의 이성산성 등이 대표적이고 북한산의 일부 산성과 아차산성, 불암산성,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증산성, 청마산성 등이 있다.
 
신라의 성곽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출반한 신라는 서남쪽으로 백제, 가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이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으며 바다 건너 왜(倭)의 침공도 그치지 않았다. 또 동북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말갈이 수시로 침범해 왔고 진평왕때부터는 남으로 내려오는 고구려이 세력에 맞서 항쟁해야 했다.
  이러한 세력들의 틈바구리에서 성장한 신라는 일찍부터 성을 쌓기 시작 하였다.
시조 박혁거세가 왕 21년(기원전37)에 서울 금성(金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금성이 성곽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처럼 도성을 따로 쌓지 않았다. 왕국의 주위에 나성이 없는 대신 경주 외곽에 명활산성이 도성 방어의 관문 구실을 하였으며, 20대 자비왕때에는 지방의 요새인 삼년산성을 쌓기도 하였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삼국 통일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성인데 3년에 걸쳐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의 성곽
  통일을 이루한 신라는 국토의 재정비에 따라 행정의 중심지역과 황해도, 평안도 등 새로 국경이 된 북방지역에서 대부분 축성이 이루어졌다.  곧 문무왕 때에는 왕도 중심의 방어선이 완공되고, 신문왕 때에는 지방 중심지인 소경(小京)의 성곽이 축조되었으며 효소왕, 경덕왕 때에는 북방으로의 진출과 함께 장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성덕왕에는 국경에 장성을 쌓아 북방의 경계를 굳게 하는 한편 동해의 왜구를 막기 위해 울산에 관문성을 쌓아 동해안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현덕왕 18년에 평양 북계선(北界線)이 확정되었고 그 이후에는 축성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의 성곽
  고려는 태조 이후 예종에 이르기까지 약200년 동안 북방의 변경에 많은 성을 쌓았다. 이러한 변경의 축성은 건국 이후 고려가 추구해 온 북방 정책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글 가운데에서도 천리장성과 윤관(윤관)의 9성 설치는 적극적인 영토의 확장이라는 점이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석성보다 토성을 더 많이 쌓았으며 도성인 개경이나 강화에도 토성을 쌓았다. 끊임없는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으므로 석성보다는 손쉬운, 그리고 공사기간도 짧은 토성 쪽을 택하였던 것 같다. 고려 말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해안지방에 읍성이 만들어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

조선전기의 성곽
 조선조의 창업과 동시 부곡상병을 위해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말의 외침에 시달린 경험을 바탕으로 북경행성의 축조등 성곽축조를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여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연해읍성의 측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읍성은 여말에 축성된 것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읍성이 없었던 곳은 신축하였다. 이 시대의 읍성으로 현존하는 것이 많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 태조5년에 각도 민정을 징발하여 축성을 완료하였다. 처음에는 토축이었으나 나중에는 석축으로 개축되었다. 개축된 석성은 둘레가 약 17km, 높이가 40척 2촌이었다. 성에는 대문이 4, 간문이 4, 총 8문이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벽을 숙종, 영정조때에 수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있는 남대문의 공역은 태조 5년 2월에 완성되었고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보물 1호인 동대문은 태조때 축조되었으나 현재의 성문은 고종6년에 전부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8문중 현재 남아있는 성문은 남대문, 동대문, 광희문, 숙청문이다. 이중 동대문, 돈의문은 옹성이 있었다.
 조선조 초기 도성의 축조가 있은 뒤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북방변경에서는 적의 침략에 대비 행성의 축조가 성행하였다. 행성은 고려시대의 장성축조 방식과 흡사하게 축조되었는데 세종때 축조된 행성을 살펴보면, 의주행성을 비롯 15개소가 축조되었다. 행성은 일정한 지역을 갈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성으로 행성을 여러개 묶어 연결된 것을 장성이라 한다. 행성의 설치위치는 적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고개 마루지역을 차단하면서 수십 혹은 수백 리를 쌓은 것이다. 산지는 내외의 지반을 삭토하고 평지는 내외협축의 석축이었다.
 관문은 행성이나 장성 혹은 내지의 중요한 요로에 문을 닫고 지키기 위한 것으로 임진왜란이후 숙종 영조 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것으로 선조27년 설축하게된 조령관문이 있는데 이성은 삼중관문이었고 영조대의 남안과 청천강의 북안 중간에 있는 적유령을 비롯 수 십개소에 관방시설이 만들어졌다. 한편 여말 왜구 침입에 대비했던 읍성축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세종, 성종 때에는 읍성의 축조가 활발했는데 이 당시 읍성축조의 특징은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적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부분의 읍성중 이 당시에 축조된 것이 많다. 이 당시 읍성의 대부분은 석성이었다. 읍성은 산지에 축조된 산성과는 달리 평지나 구능지지역에 축조한 경우가 많아 원형 방형 형식이 많았다. 성의 규모도 시가지 일부를 포함 객사, 관야 등의 건물을 두고 있어 행정, 군사적 요소를 갖는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조의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산성축조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유사시에 천연자연지세가 유리한 산성에 입보하여 오랫동안 굴복치 않고 항쟁할 수 있는 것도 산성 특유의 장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말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전쟁양상이 변화하게 되어 종전의 방어시설도 개선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곽의 방어시설물은 보강이 요구되어 읍성에는 적대, 여장, 옹성, 해자등은 규격화 화게 되었고 성벽은 견고하게 하였고 높이는 자연 높아졌다.
 
임진왜란의 성곽전
 임진왜란 오랜 평화 속에 잠자고 있던 조선을 불시에 7년간에 걸친 전쟁 속으로 휘몰아 넣어 무수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내게 하였다.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풍신수길이 전국을 통일한 뒤 대대적인 침략 전을 준비한 끝에 선조24년 4월 13일에 총 15만 8천 7백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해 왔다.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에 큰 저항 없이 북상하여 20일만에 서울에 입성하였으며 왕은 이에 앞서 피난길에 올라 평양으로 갔다가 다시 의주로 서천하기에 이르렀다. 왜군은 수적으로도 압도적일 뿐 아니라 전쟁의 경험이 풍부한 조직된 정예군이었으며 또 잘 훈련된 조총부대의 위력으로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하였다. 이 같은 적의 조총부대의 위력 앞에 조선 군사는 제대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수령과 변장들이 먼저 도망하고 숨어버려 전세는 걷잡을 수 없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전국에서 의병들이 수없이 일어나 왜군 점령지의 전후방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한편 해상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승첩이 있었고 육지에서는 명나라 원군의 반격전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진주성, 행주성 싸움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명나라와 일본간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져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며 4년동안 사신이 오락가락하다가 마침내 회담이 결렬되자 선조 30년 왜군은 조선을 다시 침공하였다.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유린 남원성, 진주성을 점령하고 북상을 기도하였으나 육상에서는 직산 소사평 싸움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고 해전에서는 명량해전의 대패로 왜군의 서쪽 진출이 저지되었다.
 이리하여 십 수만의 왜군은 울산에서부터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백 리에 성을 쌓고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다가 마침내 배를 타고 도주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에 온 일본 사신들이 가져온 글 속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쳐들어가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우리 조정에서는 비로소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남쪽 3도의 방비를 서둘렀다. 경상, 전라, 충청 감사를 그 지방 사정에 밝은 사람으로 뽑아 보내어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경상도에는 성을 많이 쌓게 하였다. 그러나 오랜 평화에 젖은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하였으며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경상감사 김수는 성을 쌓는 일에 힘을 기울여 가장 많은 성을 수축하였으나 험준한 위치를 선정하지 못하고 평지에 그대로 쌓은 것이었고 또 규모만 넓게 잡아 오로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더욱이 높이가 2에서 3장에 불과했고 참호 역시 형식으로만 끝난 것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대규모의 전쟁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또 왜군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방의 수령이나 백성들의 마음이 헤이해진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산성 수축의 불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 조정에서는 험준한 산을 의지하여 관액을 설치할 것과 산성을 수축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혹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유성룡등 많은 사람들은 험준한 요로에 산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충주, 용인, 진주성에서의 패전의 원인이 평야 성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의 주장은 포루제도를 쓰자는 것이었다. 포루제도는 명나라 사람의 병서 기효신서에서 비롯된 착상으로 산성의 일정한 거리마다 포루를 설치한다면 적의 조총도 무기력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기효신서에 의하면 성밖 둘레에 우마의 울타리처럼 담장을 쌓고 그위에 대총통의 구멍을 내고 아래쪽에 소총통의 구멍을 내어 천보마다 하나씩 포루를 설치하여 적이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일시에 총을 쏘아댄다는 것이다.
 포루의 설치는 조총이라는 신무기의 등장으로 현실적인 필요성이 제기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성의 수축과 포루제도를 절실하게 강구하고자 하였으나 포루의 설치는 그 뒤에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산성 수축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령일대의 관문 설치를 검토하게 되고 제천, 단양, 영춘 등지에서 수축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전라도에서는 남원의 교룡산성, 정읍의 입암산성, 건달산성, 수인산성 경상도 가야의 용기, 지리산의 귀성, 합천의 이숭산성 등을 수축하였다. 축성을 서두르기 시작한 것은 선조 26년 4월 이후 왜적들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전국이 소강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수복된 지역내의 장기전에 대비코자 한 준비였다. 이때의 축성에는 대부분 승군들이 동원되었는데 전투에 참여했던 유능한 승장들이 축성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도 해변에 성을 쌓았다. 울산, 서생포로부터 동래, 김해, 웅천, 거제로 이어지는 해변의 열여섯 곳에 진을 쳤는데 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속셈으로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서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지구전을 전개하였다.
 
조선후기의 축성
  임진왜란을 치르고 나서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지의 읍성과 변방의 요새에 축성과 개축이 활발해졌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1백여 년이 지난 숙종, 영조시대에 축성 공사가 크게 일어나 많은 토성이 석축으로 바뀌어졌고 새로운 성이 만들어졌다. 영조이후에는 이렇다할 축성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성의 개축은 미미하게나마 이루어졌는데 1785년에는 청주 읍성이, 1804년에는 개성의 청석진성이, 1808년에는 동래금정산성이 수축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와서는 병자호란 이루 2백여 년간의 승평이 계속되면서 상하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군제마저 해이해짐에 따라 축성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국력이 쇠퇴하고 사회 각층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터에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축성이 추진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1812년에 대왜 방비책으로서 저술한 민보의라는 책에서 민간의 전력 동원책과 선수후전을 골자로 하는 민간 자위체제를 역설하였다. 다산의 주장은 관의 지원 없이 백성들이 자력으로 전시에 향민과 그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각 지역별로 요해지에 사보를 설치하고 이를 거점으로 적에 대해 소모전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다산의 민보의의 구상은 그 뒤에 익명의 학자가 쓴 이초문담, 1867년 훈련대장 신관호가 쓴 민보집설, 1872년 주희상의 민보신편등으로 이어졌으며 민보집설은 현실적인 비변책으로 조정에서 공인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절실하게 제기되었던 민간방위의 여러 대책도 현실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성곽에 대한 생각
 

우리 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며 조상들의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의 역사 속에서 외적을 막아 국토를 지키려 했던 선인의 끈질긴 호국의지의 산물이다. 성돌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하기 위해서 목도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시절에 백성들의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성곽은 쉼없이 축성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성곽의 나라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산성이나 도성은 자연의 형세를 이용하여 꾸불꾸불 굽이쳐 돌아나간다. 네모 반듯한 중국의 성이나 성관을 중심으로 쌓는 일본의 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이다. 외적이 침입해오면 군인들뿐 아니라 백성들이 함께 성안에 들어가 성문을 닫아걸고 끝까지 항전하여 성을 지킨다. 부녀자들까지도 병사들을 도와 돌을 날랐으며 승려들도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허물어진 성벽 한 자락에서 우리는 조상들의 국토수호에 대한 숨결을 느낄 수가 있다. 무너져 내린 그 성돌 하나에도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좁은 국토에서 유난히도 전란이 많았던 나라, 그리하여 산 위에 평지에 바닷가에 유난히도 많은 성곽을 쌓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드높은 의지와 함께 고달팠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성밟기를 하면 일년 내내 다리 병이 안 난다고 해서 고창 모양성에서는 윤달이 부녀자들이 성을 밟는 민속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성돌을 빼 가면 부정을 탄다고 전해져 성벽이 잘 보존되는 읍성도 있다. 승주 낙안읍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민속과 금기는 성벽을 오래오래 잘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얼핏 하잘것없이 보이는 성의 흔적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문화재라는 점을 인식하여 보존과 또 성곽에 대한 연구에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인용:  http://myh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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