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여주는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며 이 고장의 역사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남한강, 남한강을 제쳐두고는 여주를 말할 수 없다. 한강 상류이며 이 고을사람들이 여강이라 부르는 남한강은 주변의 풍정과 어우러지며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난 문장가들이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지금의 여주땅이 비록 강이 막히고 도시가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신륵사의 종소리는 천년을 깨우고 절 앞에서는여강은 여전히 예전의 잔영이 남아 있어 아름답다
신륵사에서 바라본 남한강.
 이 고을에 뚜렷한 지명이 나타난 것은 고구려 장수왕 64년(476)의 골내근현이다. 그 후 황여·여흥을 거쳐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는 부에서 군으로 승격과 강등을 거듭했다. 1469년 세종릉이 왕대리로 천장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 고쳐 불렀다.
 여주의 농경문화는 일직이 청동인들에게서 발달의 기초를 찾게된다. 19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때 점등면 흠암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와 반월형 석도·무문토기 등을 비롯, 탄호된 벼·보리·조·수수 등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벼농사의 전개 경로를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렇듯 여주에는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대신면 보통리와 능서면 용온리, 여주읍 상리·매룡리 등지에 많은 고분이 있고, 대신면 천서리에 파사산성이 능서면의 신지리 성터를 비롯해 유적이 풍부하다.
능서면 왕대리의 영녕릉에는 조선 제 4대 세종과 왕비, 제17대 효종과 왕비다 잠들어 있고, 고(故)건축물로는 상리 영월루와 능현리의 명성황후 생가, 대신면 보통리의 김영구가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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