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華城)

종 목  사적 3
분류  성지(성곽)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대  조선 정조 20년(1796)  
재료,재질  석재류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朝鮮) 정조(正祖)가 동왕(同王) 13년(1789) 그의 생부(生父)인 장헌세자(莊獻世子)(속칭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후에 융릉<隆陵>으로 추증함)을 양주(楊州) 배봉산(拜峰山)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邑治)와 민가(民家)들을 수원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正祖)는 부왕(父王)인 장조(莊祖)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華城遷都)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築城工事)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준공되었다. 이 화성은 실학자(實學者)로 불리는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성역(城役)을 주관하고 조심태(趙心泰)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構造物)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石材)와 전(塼)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銃砲)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用材)를 규격화하여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蒼龍門), 서쪽으로 화서문(華西門), 남쪽으로 팔달문(八達門), 북쪽으로 장안문(長安門) 등 4대문을 내고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포樓)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行宮)을 지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門樓)가 파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復元)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서남루까지의 450m 구간과 방대한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팔달문 (八達門)
종 목  보물  402
분류  성곽건축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팔달로2가  
시대  조선 정조 20년(1796)  
재료,재질  목재  

  이 문(門)은 수원성(水原城)의 남문(南門)으로서 정조(正祖) 18년(1794) 수원성 축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 문은 석축(石築) 홍예(虹예) 위에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루가 있고, 문루 주위에는 여장(女墻)을 둘러 쌓았으며 전면에는 반원형(半圓形)의 옹성(甕城)을 쌓고 좌우에는 적대(敵臺)를 두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축문방식(築門方式)은 서울의 남대문(南大門)이나 동대문(東大門)과 같으나, 다만 문루의 네 귀퉁이에 고주(高柱)를 세우지 않은 점이 약간 다르다. 문의 규모는 홍예의 높이가 3.17m,너비 3.56m 두께 6.4m이며 문주는 정면이 9m(3칸), 측면이 3.6m(2칸)이다. 이 문은 다행히 6·25동란 때에도 별로 큰 전화를 입지 않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화서문 (華西門)
종 목  보물  403  
분류  성곽건축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25-2  
시대  조선 정조 20년(1796)  
재료,재질  목재  


  화서문(華西門)은 수원성(水原城)의 서쪽 문이다. 문의 제반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문(蒼龍門)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도 동문옹성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루(門樓)는 홍예문(虹예門) 위에 단층으로 되어 있고 바깥쪽으로 벽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이 설치되었다. 문의 안쪽 남쪽편에는 수문청(守門廳)이 있었고, 문의 바깥쪽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어 굽어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옹성은 모두 벽돌로 쌓고 현안 3개와 여장에 네모꼴 총혈(銃穴) 19개 사혈(射穴) 6개가 뚫려 있다. 공심돈(空心墩)은 화서문과 같이 축조된 2층으로 된 망루(望樓)로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인데 이 같은 망루는 우리나라에서는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銃眼)-포혈(砲穴)이 뚫려 있고, 위에는 단층의 목조누각을 만들어 총안이 뚫린 판문(板門)시설을 하여 먼 거리의 목표물로부터 근거리의 목표물까지 한꺼번에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바로 아래의 성벽에 다가붙은 적을 공격하는 현안(懸眼)이 마련되어 있는 점에서는 치성(雉城)·적대(敵臺) 등과 그 기능이 동일하지만 성벽보다 윗 부분으로 치솟은 부분은 독특한 기능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팔달문 동종 (八達門銅鐘)

  팔달문 2층 누상에 걸리어 있는 이 종은 원래 조선(朝鮮) 숙종(肅宗) 13년(1687)에 화성군(華城郡) 만의사(萬義寺)에서 주성(鑄成) 봉안(奉安)하였던 것으로 높이 123cm, 구경 75cm의 육중한 대종(大鐘)이다. 전형적인 전통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종은 음통(音筒)과 단룡(單龍)의 종뉴(鐘유)아래에 안으로 약간 오무라든 종신(鐘身)을 연결한 형태인데,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 있으며, 세부적인 묘사 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즉, 음통은 용의 꼬리가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그 상단(上端)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 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신에는 2열원문범자(二列圓紋梵字)의 상대(上帶)와 연화당초문(蓮華唐草紋)의 하대(下帶)를 둘렀다. 상대(上帶)에 붙여서 사실성 있는 풀무늬(草紋)의 4유곽(乳廓)과 연꽃을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종복(鐘腹)에 명문(銘文)을 둘렀다. 또한 이 종은 이보다 1년 전(1686)에 제작된 통도사(通度寺) 종루종(鐘樓鐘)과 크기만 다를 뿐, 활짝 핀 연화장식의 음통표현, 가운데 1개만 돌출시킨 종유(鐘乳), 보살상 및 유곽대(乳廓帶)와 상·하대(上·下帶)의 문양 등 모든 부분의 표현 방법에서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팔달문 동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양식(梵鐘樣式)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종뉴는 조선(朝鮮) 후기(後期) 조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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