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돈대·강화역사관

갑곶돈 (甲串墩)
종 목  사적  306
분류  진.보.돈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  
시대  조선시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정리에 위치한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서 몽고와 줄기차게 전쟁을 치룰 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김포군에서 강화대교를 건너면 바로 왼쪽에 자리해 있다. 조선 인조 22년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숙종 5년(1679)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으나, 동년 10월 13일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 부대에 패주하였다.
  돈대 안에는 조선시대 대포가 전시돼 있는데 일명 홍이포라 한다. 사정거리 700m의 대포로써, 포를 쏘는 원리는 포구로 화약을 장진하고 다시 포알을 넣은 다음 포 뒷쪽 윗 구멍의 심지에 불을 붙여 넣이게 된다. 그러면 그 안에서 화약의 폭발과 함께 그 힘에 의해 포알이 날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포알은 폭발하지 않는 단순한 쇠덩이로, 살상 능력은 그 당시 서양대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고 한다.
  포신의 길이 258cm에 무게가 3톤이며 포신을 받치는 수레는 당차라 불리며, 힘센 소 또는 말이 끌고 다니게 되어 있다. 이 포는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 사용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 운양호사건 때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이 사건이 국내의 천주교인과 서양인이 내통 하에 일어난 것으로 단정하고 다시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였으며, 이곳 해변에서 최인서(요한) 외 여섯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지금은 검은 갯벌로 뒤덮여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갑곶돈대 바로 아래에 있는 강화역사관은 강화의 모든 역사를 한 눈에 조감할 수가 있다. 전시관의 1층에는 선사역사실, 2층에는 국난극복실로 꾸며져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외날찍개, 주먹도끼, 찌르개 등을 비롯해 구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마제석기, 청동기시대의 생활유물 그리고 강화 출토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강화의 해안지역에서 동굴 생활하던 모습뿐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을 재현해 놓아, 역사기행의 코스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강화 역사관 전시실 안내

▶ 제1실
  석기시대부터 선조들의 생활흔적인 돌도끼, 돌칼, 환석, 유문토기등을 전시했으며 지석묘, 청동기시대 생활상등이 펼쳐진다.
-구석기시대-통일신라시대     


▶ 제2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전시실로 고려 고종19년(1232)에 강화천도시부터 불심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던 팔만대장경 제작과정, 그외에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     

▶ 제3실
  몽고침입에서 병자호란 당시 유품등이 전시되어 있다.
-몽고침입-병자호란     

▶ 제4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전투의 생생한 모습과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말미 암은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면서 강화의 3.1운동사가 펼쳐진다.
-신미, 병인양요-3.1일 운동     

 강화동종(江華銅鍾)
종 목  보물 11호
분류  동종류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0 강화역사관 내부  
시대  조선시대  
재료,재질  동  

  이 종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37년(1711) 강화유수(江華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주조(鑄造)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 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乳廓)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옆띠를 돌려 구연대(口緣帶)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鑄鐘) 관계와 개주(改鑄)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종각(鐘閣)은 260여년전에 강화성(江華城)의 남문(南門) 동쪽에 건립하였던 것을 강화국방유적(江華國防遺蹟) 복원정화사업(復元淨化事業)과 함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존(保存)하고 있다. 총중량이 3,912kg에 높이가 198cm이고 구경(口徑)이 138cm에 달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巨鐘)에 속한다.

강화갑곶리의탱자나무 (江華甲串里의탱자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78호
분류  노거수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16  

  수령(樹齡)은 4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4m, 지상부의 줄기 둘레는 1m이다. 2갈래로 갈라졌으며 가슴높이의 지름은 10㎝, 14㎝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이 1.5m, 서쪽이 4.4m이며, 남쪽이 3.3m이고, 북쪽은 2.2m이다. 운향과의 낙엽관목이며 3m 정도 자란다. 가지는 다소 편평하며 녹색이고 길이 3-5㎝의 굳센 가시가 있다. 잎은 호생(互生)하며 3출엽(出葉)이고 엽병(葉柄)에 날개가 있다. 소엽(小葉)은 두껍고 도란형 내지 타원형이며 끝이 둔하거나 파지고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희며 꽃받침잎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많으며 자방에 털이 있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3㎝정도로서 향기가 좋으나 먹을 수 없고 약용으로 한다. 묘목은 귤나무의 태목(台木)으로 하고 성목(成木)은 남쪽에 있어서 산울타리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나무의 유래(由來)는 몽고병이 침공하였을 때 고려의 고종(高宗)께서 28년간 강화에서 정무(政務)를 살피셨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의 가족이 강화도에서 전란을 피하였다. 이러한 전란(戰亂)을 계기로 하여 성(城)을 튼튼히 쌓고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성(城) 밑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성(城)은 무너져 없어졌으나 그 밑에서 적병(敵兵)의 발뿌리를 노리던 탱자나무의 일부는 남아있다. 따라서 국토방위(國土防衛)의 유물(遺物>이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북쪽의 한계지(限界地)이다. 여기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힘쓴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직접 볼 수 있게 한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오늘의 임업연구원에서 하고 있는 일은 바로 탱자나무를 가꾼 선현들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갑곶나루선착장석축로 (甲串나루船着場石築路)  
종 목  시도기념물  25호
분류  기타문화재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김포군 월곶면 성동리 일원  

  이곳은 강화읍 갑곶리와 월곶면 성동리 사이를 배로 연결했던 곳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없이 이용되었다. 세종 원년(1419)에서 14년(1432)사이에 박신(朴信)이 최초로 석축로를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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