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마을
 

노릇한 초가지붕과 사립문, 정겨운 돌담과 고샅, 시렁에 매달린 메주와 마루 한 끝에 놓인 늙은 호박, 동틀녘에는 닭이 울고 저녁 해거름에는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붉은 노을 속으로 피어오르는 마을. 1960년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나 양기와로 교체되기 전만해도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살았다.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절의 일인데도 그런 마을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만 그리움으로 묻혀 있다. 그러나 낙안(樂安)에 가면 그런 마을을 실제 만날 수 있다. 낙안의 기록은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니까 낙안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백제 때에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비로소 낙안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변의 여러 고을을 관장하는 행정중심지이자 남해안을 지키는 군사요지로 번화했지만, 1910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폐지되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주변의 편리한 도로교통을 따라 새로운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낙안은 중심지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낙안이 민속마을로 지정된 것은 1983년 낙안읍성 옛터가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이다.
낙안읍성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실제 마을이라는 점이 어느 민속 마을과는 다르다. 낙안마을이 낙안읍성마을로 불리는 것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 때문이다. 대개 성곽이라고 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성을 떠올리게 되는데, 낙안의 성곽은 산에 의지하지 않고 평지의 마을을 둘러싼 읍성이다. 본래 낙안읍성은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으면서 성의 규모가 커졌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둘레 2,865척, 높이는 9.5척, 여장이 420개로 높이가 2.5척, 옹성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성안에는 우

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밖의 해자는 파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이 설치되고, 여장은 모두 붕괴되었다.
 현재 읍성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동문에서 남문 사이의 성곽이 가장 온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남해 순천만을 통해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므로 특히 왜구가 들어오는 남쪽 부분이 튼튼하여 지금까지도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의 북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것은 왜적이 들어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약하게 지어졌으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 여,순사건 때 산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마을로 넘나들면서 파괴된 것이라 한다.
낙안읍성을 돌아볼 때는 동문으로 들어가 문 위의 낙풍루(樂豊樓)로 올라가서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돈 뒤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특히 남문을 지나 성의 북쪽으로 돌계단이 이어지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정취가 가장 좋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을 한채 한채 따져보다 보면 구수한 맛이 덜하게 되고, 또 마을 안의 민속주점들 탓에 한껏 마음과 시선을 주기 힘든데, 이곳에 올라보면 이런 단점이 묻히고 마을 전체의 푸근한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자리에서는 낙안읍성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매우 아름답게 조망된다.
드넓은 낙안벌 너머로 북쪽은 금전산, 동쪽은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은 백이산, 남쪽은 백이산 줄기에서 떨어진 옥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땅은 넓고 백성이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뼏쳐 있어 남방의 형승지로는 이곳이 제일이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칭찬한 낙안 풍광 그대로다.

 낙안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