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아름다움 가운데 그 중 큰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그 사람의 아름다운 자취일 것이다. 강진 땅의 남도다운 아름다움은 다산 정약용의 자취로 하여 그 빛을 더한다.
강진군 도압면 만덕산 기슭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고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졍약용은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며, 언제 끝났지 알 수 없는 자기 생애의 한겨울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렸을 것이다.
정약용이 사학(邪學,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명을 덮어쓰고 강진에 귀양 온 것은 순조 1년(1801) 11월이었다. 그가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촌사람들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에게 겁을 먹고 앞다투어 달아날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이후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은 정약용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의 네 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던 그 시절,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상례(喪禮)를 연구하며 침식을 잊었다고 하였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마침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제법 긴 비탈을 한동안 오르노라면 길가에 무덤이 하나 보이는데, 윤단의 손자이며 정

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다. 여기서는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동자석 두기가 말간 얼굴로 참으로 인상 깊다. 그곳을 지나 좀더 가팔라진 비탈길을 따라 주변이 어둑어둑하도록 동백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올라가면 곧 다산초당이다. 하지만 다산초당은 초당답지 않게 매우 크다. 이는 페허가 되었던 옛터를 다시 크게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 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년 연하였지만, 평소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다. 한편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그 시절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이 땅과 그 병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았으며, 젊었을 때는 물론 벼슬하던 번거로운 시절에도 늘 마음에 두었던 실학과 애민(愛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을 것이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의 절반은 수신(修身)을 하기 위함이요 절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목민심서』序文 중
푸른 하늘에 학이 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