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의 천불천탑

아주 먼 옛날 전라도 능주 땅 한 골짜기에 어느 누가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아 그렇게 정과 망치를 두드렸을까. 그것도 숨을 죽이면서…. 그러다가 ‘날이 샛네!’라는 탄식에 그들은 왜 연장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일까. 화순 운주사 골짜기에 흩어진 수많은 불탑과 불상들을 바라보며 갖는 의문이다. 이른바 천불천탑은 왜‘관찬사서’(官撰史書)에는 한 줄도 올라가지 못했을까. 우리 문화유산들 가운데 석굴암·고려불화·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성덕대왕 신종·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 같은 유물들은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찬탄받고 있다. 그러한 심미적 잣대를 들이대면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와 동냥치 탑은 형편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역사적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한다면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돌이켜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전제왕권을 강화한 신라 경덕왕대에 조각된 석굴암 본존불에는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진다. 거기에 비해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는 얼마나 편안한가. 석굴암 본존불에서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촌로라도 운주사 부처님 앞에서는 극락왕생의 희망이 보일 듯싶다. 그러나 귀족불교미술의 정수인 석굴암 본존불과 민중불교미술을 웅변한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는 우리 미혹한 중생들이 구분지은 부처일 뿐 부처님 세계에서는 어떤 차이도 없다. 전남 화순 운주사의 불교유적은 ‘다탑봉(多塔峰)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알려져왔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석불·석탑은 그 신비감과 토속적인 조형성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낸다.

▲운주사는 초입에서부터 좌상과 입상이 뒤섞인 6개의 돌부처와 5층석탑이 눈에 뛴다

그러나 미술사학계에서는 그동안 문헌자료의 부족과 조각의 촌스러움을 이유로 이렇다할 연구성과를 못냈다. 다행히 전남대 박물관이 84∼91년 네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와 두차례 학술조사를 통해 일부 베일을 벗게 했을 뿐이다.

운주사의 불적은 많은 탑과 불상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흔히 경주의 남산과 비교된다. 그러나 운주사의 불상과 탑은 남산처럼 여러 계곡에 별개의 불사로 나뉘어 있지 않다. 1백여분의 돌부처와 20여기의 석탑이 한 계곡에 널브러져 있어 그것은 마치 석불·석탑의 야외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우리 불교미술사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유적이다. 이 유적에 대해서는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 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의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지만 이 미완의 도장은 여전히 물음표다.

석굴암 본존불에 익숙한 눈으로 이들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못났다. 돌부처의 눈·코·입의 생김새는 물론 형체 비례도 어색해 부처의 위엄도 서지 않을 정도다. 석탑도 마찬가지. 자연석 기단과 특이한 장식 무늬, 원반형이나 투가리 같은 옥개석의 석탑은 물론 판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옥개석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이처럼 정형이 깨진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감이 느껴지는 토속적 해학미, 또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 불적의 신선한 감명이며 특이한 마력이다.

구름도 쉬어가는 절 雲住寺와 ‘行舟論’

이 지역 사람들은 왠지 역사적으로 소외되어왔다고 여기는 자신들의 모습과 운주사 못난이 돌부처와 동냥치탑을 동일시하는 정서가 물씬 풍긴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직후 많은 이들이 이곳 운주사 골짜기에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였다. 불교의 천불신앙은 흔히 참회신앙이라 한다. 그러면 누가 무엇을 참회하기 위해, 또는 참회시키기 위해 이곳에 천불을 조성하려 했을까.

운주사는 ‘運舟寺’‘運柱寺’‘雲柱寺’‘雲住寺’ 등으로 불린다. 운주사가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린 것은 조선 후기라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한반도를 배 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이나 발굴 조사된 고려시대 암키와의 명문에 의해 확인되는 본래의 절 이름은 ‘雲住寺’다. 구름도 머물다가 쉬어가는 절 운주사. 그것은 세파에 찌든 이들의 피난처였던 셈이다.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호남정맥으로 한 자락 산줄기를 드리운 곳에 무등산이 자리한다. 그 산줄기는 다시 국사봉과 화학산으로 뻗어내려가다가 운주산 다탑봉에 다다른다. 양쪽으로 벌어진 낮은 구릉(非山非野)의 산등성이 사이 계곡에는 여기 저기에 불상과 탑이 우뚝우뚝 서 있다.

▲운주사 대웅전 뒷산에서 내려다본 석탑군. 맨 아래 부분이 두개의 좌상이 등을 맞대고 들어앉아 있는 석조불감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들은 군상이든 단독상이든 모두 각각 독립된 구조여서 한 무더기 한 무더기가 마치 야외 불전 같은 성격을 띤다. 어떤 돌부처는 몇분씩 무리지어 암벽에 기대었거나(6개의 암벽 불상군), 돌집에 들어앉아 계시거나(석조불감 안의 두 석불좌상), 암벽에 새긴 부처님과 산 정상에 나란히 조각된 채 일으켜 세워지지 못한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등 배열 상태가 좀 색다르다.

입상과 좌상의 돌부처들은 손 모습도 여러 가지다. 항마인이나 아미타 구품인식 수인, 합장인, 가사에 가려진 채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수인이나 소매를 교차하는 도포식 수인 등 다채롭고도 변형이 심하다.

이 운주사 불상의 수인은 특히 얼마 전 조사된 지리산 정령치 마애불상군 중 주존과 양식적인 면에서 유사하여 주목을 끈다. 정령치 마애불에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명월지불’(明月智佛)이라는 명문을 발견한 것은 운주사 불상의 명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정령치 마애불상 앞의 절터도 운주사처럼 도선국사 창건설을 간직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운주사의 불적 중에서도 신앙적 중심은 마애여래좌상과 와불이라 불리는 석불좌상·입상 및 돌집 모양의 석조불감, 그리고 칠성바위다. 두 와불은 13m가 넘는 거대한 암반에 부처를 새기고 떨어내는 공정을 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돌부처로 운주사 석불의 제작방법을 추스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와불 입구에 서 있는 석불입상(시위불·머슴부처)은 채석자리가 와불 옆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여타 문헌의 운주사를 언급한 기사에서 늘 다루어지는 것은 돌집에 서로 등을 대고 앉은 모습의 두 석불이다. 이것은 석조 불감이 운주사 불적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신앙처로 주목받았다는 증거다. 이러한 사실은 사역 내의 중앙에 위치하는 점이나 돌로 만든 전각 안에 두 분의 부처를 모시는 정성으로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운주사의 그 유명한 와불은 와불님이 아니다. 불교에서 보통 와불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상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모로 드러누우신 상태에서 열반하셔서 측와상(側臥像)으로 나타나셔야 한다. 하지만 운주사의 경우는 이러한 측와상이 아니고 반가부좌로 앉아 계신 모습의 본존불과 서 계신 모습의 협시불을 암반에 조각하고 미처 털어내서 일으켜세우지 못한 미완성 부처인 것이다.

▲192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0석불 입상 사진. 멀리 구릉 군데군데에도 석탑들이 흩어져 있다.

▲13m 크기의 초대형 좌상과 입상. 미완성의 이 석불은 본래 바위에 그냥 붙어 있어 실제로는 누워 있는 형상이다.

누워있는’ 초대형 석불좌상과 석불입상의 신비

이들 돌부처에 비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명보는 대웅전 뒤켠에 자리한다. 운주사 불적과 일대의 풍경을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공사바위 바로 아래 암벽의 마애여래좌상이 그것이다.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은 운주사 계곡 안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과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계곡에 배치된 돌부처 가운데 대형의 주요 석불좌상들과 유사한 자태의 이 마애불은 이목구비와 화염무늬 광배 등 다른 석불에 비하여 제법 부처로서의 도상적 형식미를 갖추었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마애불 조성 당시에는 천불천탑의 불사를 조망하도록 이 부처를 새겼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찌보면 이 마애불은 좌우 계곡의 돌부처들을 협시로 두르고 경내를 굽어보는 위치상의 중심부처로서, 운주사의 신비를 푸는 데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수도 있겠다.

운주사 석탑과 석불의 제작시기에 대한 문제를 푸는 데는 현지의 탑과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유심히 관찰해 보아야 한다. 불상과 탑의 모양새는 크게 보면 비교적 전통성을 유지한 경우와 크게 벗어난 두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불상에서는 크고 작은 돌부처를 암벽에 기대거나 앉힌 불상군이 이채롭다.

와불과 석조불감의 불상 그리고 마애불 등 각기 독립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단독 예배상 유형이 그대로 격조를 갖춘 편이다. 탑에서는 백제계나 신라계 그리고 전형적인 고려탑의 면모를 갖춘 방형 옥개석의 전통식과 원반형이나 원구형의 옥개석을 쌓아놓은 특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불상이나 탑의 생김새 차이가 제작시기의 일정한 경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순한 배열상의 문제일 수도 있어 지금으로서는 확언할 수 없는 일이다.

운주사 불적 가운데 계곡 왼편 산등성이 허리께쯤에 위치한 ‘일곱개의 바위’가 주목을 끈다. 칠성바위다. 이 바위들은 원반형 7층석탑의 옥개석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배열 상태는 원반 지름의 크기와 배치 각도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와 매우 흡사하여 고려시대 불교에 수용된 칠성신앙의 사례인 칠성바위가 분명하다. 이처럼 칠성바위의 중요성은 고려시대 천문관측 수준을 짐작게 하는 중요한 데이터를 실물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일곱개의 원형 바위로 이뤄진 칠성석. 바위들이 마치 북두칠성처럼 박혀있다. 별들의 밝기에 따라 바위 크기도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별의 밝기에 대한 등급을 문헌으로 남긴 최초의 자료는 “동국문헌비고”(영조 46년·서기 1770년·홍봉한 외 지음)의 “상위고”(象緯考)인데 운주사의 칠성바위(고려 중기 12세기 제작설을 평균치로 해도)는 이보다 적어도 6백년 정도 앞선 유물인 셈이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별 등급 데이터다. 이러한 사실에서 운주사의 칠성바위는 초국보급 유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셈인데 우리가 그동안 대접을 너무 소홀히 한 듯하다.

우리는 초국보급 천문관측자료인 운주사 칠성바위가 왜 운주사에 만들어지고 천불천탑과 함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져왔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무하다. 다만 칠성바위를 통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칠성신앙 자체가 도교의 중요한 신앙형태며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도교가 매우 융성했다고 하는 사서(史書)의 내용으로 미루어 칠성신앙이 불교와 관련을 맺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임과 동시에 그러한 정황을 웅변해 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 정도다.

“칠성바위는 초국보급 천문관측 자료”

운주사의 칠성바위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를 푸는 데 중요한 자료다. 더구나 다른 계절도 아닌 한 여름철 초저녁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두칠성을 땅에 그림자로 드리워진 모습으로 만든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천불천탑의 대역사(大役事)가 한여름밤의 꿈처럼 진행된 사실에 대한 어떤 역설일지도 모를 일이다.

운주사 곳곳에는 아직도 석탑과 석불 제작 당시 돌들을 운반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와불에서 칠성바위로 가는 서쪽 산허리 주변의 암반에는 불상을 떨어낸 채석장이, 그 채석장과 칠성바위 사이에서는 암반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깊이 패인 마멸 흔적도 확인된다.

채석장과 암반 마멸 흔적은 운주사 천불천탑을 어떻게 제작했으며 10t 정도의 칠성바위 같은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하였는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암반 마멸 흔적은 거중기(擧重機)같은 운반기구로 칠성바위나 탑의 재료들을 들어 옮기다가 밧줄이 암반에 마찰하여 생긴 흔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무게가 1백t 정도는 족히 나가는 암반에 조각한 초대형 석불좌상·입상은 어떻게 일으켜세우려 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당시의 토목기술로 그것은 가능했을까. 지금의 기술로도 1백t을 들어올리려면 3백t 정도의 크레인을 동원해야 하는데 비탈진 야산 정상에 자리한 이 거대한 돌부처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일으켜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리는 없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그 시원스런 해답이 없다.

일찍이 운주사는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전남대 김동수 교수는 “동국여지지”에서 이 절이 고려 승려 혜명(惠明)에 의해 조성된 것이란 기록을 찾아냈다. 현재까지 전하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이나 가람터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봐도 도선이 활동한 9세기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비해 혜명의 창건설은 훨씬 논리적이다. 일찍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慧明)과 운주사 혜명(惠明)은 동일인이 분명하다. ‘慧’자와 ‘惠’자는 서로 통하게 쓰이는 용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일봉암기”의 기사 중 은진 관촉사 미륵불상(대인석상)과 운주지곡에 천개의 불상과 탑을 세운 것을 가리켜 비보처에 불적을 세운 사례로 든다. 두 지역을 병립시켜 서술한 이 기록은 운주사 창건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로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운주사의 불적 편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이고, 또 고려 초기 괴력을 갖춘 신이적(神異的)인 불상 조성이나 불사가 많았음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동안의 발굴은 운주사의 옛 가람 터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계곡 입구 왼편 밭은 주변에서 많은 기와와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되면서 가람터로 예견돼왔다. 발굴결과 절터는 세 층위를 이루었음이 밝혀졌다. 기와나 도자기 조각 등의 출토 유물과 유구의 축조 구조를 종합해볼 때 건물터는 하층이 고려 초, 중층은 고려 중기에서 후기, 상층이 조선 초기에서 정유재란 때(1597년)까지로 모두 세차례에 걸쳐 지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하층과 중·상층 건물터는 축선이 15도 정도 틀어져서 발견되었다.

 

▲운주사의 독특한 석탑군. 원형다층석탑. 석주형 폐탑.(오른쪽)

이는 하층 건물터가 폐사된 후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고 나서 중·상층 건물터가 들어선 것으로 이해된다. 상층 건물터에서 나온 ‘홍치팔년명’(弘治八年銘·1495년) 기와에 등장한 시주자들은 홍씨·이씨·전씨·권씨·임씨·오씨 정도가 판독되었다. 이들은 나주나 화순에 기반을 둔 지역 유력자들일 것이지만 천불천탑을 직접 조성한 세력과는 4백년 정도의 시간차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위의 세 층 가운데 어느 층위에서 살던 이들이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다.

현재 분명한 것은 상층은 불사의 시작이 아니라는 사실뿐이다. 불상과 탑에서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모양의 차이가 이들 건물터의 층위와 일정한 관련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발굴 성과는 금동불·보살 입상의 출토다. 이 두 금동불은 운주사의 돌부처들과는 달리 정통적인 형식의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이들은 그 제작시기가 8∼9세기쯤이고 호신용으로 이동이 자유롭다는 약점을 지녀 운주사 창건과 관련된 물증으로 삼기는 어렵다. 이러한 호신용 금동불은 대개 불가의 법맥 과정을 증거하는 전세품 성격이 강하나 매장 경위가 다소 아리송하다.

전남대의 발굴작업으로 고려시대 창건 확인

결국 운주사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기냐, 중기냐, 말기냐의 문제로 의견이 귀착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제작 시기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산비탈 저편에 자리한 칠성바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칠성바위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천문관측 수준을 짐작게 하는 실물 자료임과 동시에 별의 등급을 데이터로 간직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비에 쌓인 운주사 불적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서는 제작시기나 제작기간은 물론이거니와 다탑봉에 천불천탑을 조성하려 했던 세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즉 불사를 주도하는 승려들과 이들의 종교적인 열망에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집단, 그리고 불상과 탑을 만드는 제작자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어쩌면 당시 불교계와는 교리 자체가 다르면서,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성의 불교계로부터 소외받는 민중의 정서를 차용하는 새로운 종파 승려들의 개척 포교당 같은 성격이었지 않았을까. 또 나주 남평이나 화순 능주의 넓은 평야에 경제적인 기반을 가진 세력들과 승려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찰은 아닐까. 아니면 신도들을 위해 대량으로 조성해야 하는 압력에 따라 수천 석공들의 토속적인 심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유적은 아닐까. 그 해답은 지나간 역사만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