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사당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구한 말, 절조 있는 삶과 죽음으로 일생을 마친 우국지사이자, 투철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보인 역사가이다.
그를 기리는 사당인 매천사(梅泉祠)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건물과 유물관 등만이 조촐하게 남아 있다. 비록 주목할 만한 유형의 문화재는 없으나, 구한 말 나라가 혼란한 상황에서 민중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준 매천의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뜻에서 찾아 볼 만하다.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난 황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종 20년(1883)왕의 특명에 의해 실시된 보거과 첫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었는데, 시골사람이라는 불합리한 이유로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난 사실을 알고서 잇달아 있는 시험을 모두 내쳐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는 못하고 고종 25년(1888) 생원회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 고종의 어지러운 정치, 명성황후의 독점적인 세도정치 등 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구례로 내려와 역사와 경세학 등 독서와 시문 짓기에 열중하였다. 그 사이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이듬해 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어지러운 세태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등의 책으로 남겼다.
19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 전해들은 그는 절명시(絶命詩)와 유서를 남긴 채 많은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다음은 그의 유서 내용이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마라."비장히 목숨을 끊었지만, 역시 인간적인 고뇌가 없진 않았던 듯"약을 마실 때 입에서 떼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으나 대관들은 나라 운명을 걱정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데 혈안이었다. 권력자도 정치인도 아닌, 그저 부패한 세상을 피해 지리산 자락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평범한 선비인 그였지만 배운 이로서 멸망한 나라에 목숨을 대고 있음을 부끄러워한 그는 자결로써 시대와 대관들에 대한 항변을 한 것이었다.
"새와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린다./무궁화 이 세상이 망하고 말았구나./가을 등 아래 책 덮고 옛일 생각하니/세상이 글 하는 이 되기 참으로 어렵구나......"(「절명시」絶命詩)중 세 번째 수)
 그러나 그도 양반으로서의 세계관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원인을 지배세력의 부정부패에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농민군의 행동을 반역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야록』은 붓끝의 엄정함, 풍부한 자료의 수집과 인용, 문장이나 표현의 뛰어남 그리고 고종시대의 역사책이 갖는 한계를 보완해주는 한국근대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한 왕조가 어떻게 망했는지를 교훈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