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체였다. "적적한 시골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암사는 통일시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 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이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수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 내세우며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8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 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동 만이남아있다.선암사로 가는 길은 조계산 전체에 고루 드리운 짙은 나무그늘로 인해 늘 상쾌하다. 마음속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다채로울 뿐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더욱 좋다.
이 기분 좋은 숲길을 따라 약 15분 가량 오르면 오른편 길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한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부도밭을 지나 계속 가면 길가에 장승 한 쌍이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남녀상이 아니라 모두 남자상이다.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갑진년(1904), 선암사 나무장승이후 정묘년(1987)에 새롭게 세워진 나무장승이다. 갑진년 나무장승은 1907년이래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은 나무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사찰 수호업무에서 퇴직하여 경내의 설선당으로 옮겨져 보호받고 있다. 장승을 지나 계속 큰길로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모퉁이 길을 따라 돌면 반원형의 큰 무지개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길은 강선루(降仙樓)로 향한다. 두 무지개다리 중 큰 무지개다리가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昇仙橋)이다. 작은 무지개다리에서 큰 무지개다리로 이어져 강선루에 이르는 길은 강선루로 직접 통하는 큰길이 생기기 전 선암사에 이르던 옛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강선루가 이 원 안에 들어앉은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선루는 누하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팔작지붕집이다.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굽어 흐르는 계곡물 사이로 두 다리가 크고 작게 잇달아 있어 더 운치 있다. 강선루에 올라 둘러보는 경치가 더 멋지지만 오르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강선루에서 한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 길옆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길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의 삼인당(三印塘)이다. 연못의 독특한 모습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에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퉁이에는 짙은 녹음과 어울린 야생차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중간 어느 부도비의 잔재인 듯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승선교에서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 부분이 선암사의 얼굴로 손꼽히지만,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여러 개의 단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전각 20여동을 밀도 있게 나누어 배치한 공간구성 또한 허툴지 않은 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 한다. 선암사의 일주문은 순박한 표정의 용조각이 장식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기둥 두 개가 화려한 공포를 인 모습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일주문의 배흘림기둥은 곧바로 낮고 작은 담으로 이어져 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 기록에서는 산 이름을 청량산,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문에서 계단을 오르면 곧장 범종루로 이어진다. 일주문과 종루 사이의 공간이 좁기 때문일까? 흔히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배치되는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인 범종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六祖古寺'(육조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집인 누(樓)가 길게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 없이 나무기둥 사이에 흰 벽을 두었는데, 퍽 단아해 보인다. 이곳은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이다. 육조고사라는 현판을 이곳 선암사에 붙인 것은 중국의 선승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서인데, 육조(六祖)를 뜻하는 한자가 육조(六朝)로 달리 표현된 것으로추측된다.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9)이 썼다고 전해진다.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들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만세루와 함께 안마당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관상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두 기의 삼층석탑의 높이는 4.7m이며 보물 제395호이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문화재는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 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
단아하면서도 정중함이 절로 우러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순조 25년(1825)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탱화는 비단에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12명의 신장상을 그린 것이다. 가로 3.65m 세로 6.5m되는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영조 41년(1765)에 제작되었다.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석가본존불을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배치하고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놓았다. 게다가 이 협시상들은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화면 전체에 걸쳐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선암사가 소장한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불화라 할 정도로 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탱화가 곳곳에 많다. 대웅전을 비롯해 각 전각과 암자에 보관된 불화를 모두 합치면 100여 점이 된다고 한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설선당과 마주한 심검당 역시 중앙에 조그만 마당을 둔 □자형 건물로, 설선당과 유사하다. 환기창에 수(水), 해(海)처럼 물과 관련된 글자가 장식처럼 투각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선암사의 지세가 산강수약하여 전각들이 빈번하게 불타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이와 같은 처방을 한 것이고 한다. 선암사가 화재 예방에 신경을 곤두세운 흔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때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을 물과 관련된 청량산과 해천사로 바꾸기도 하였

다. 대각암 가는 길목에 있는 해천당도 그런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똑같은 이유로 선암사에는 원래 석등이 없었다고 한다. 근래 경내 곳곳에 큼직한 석등들이 조성되었는데 절의 내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유행 타기가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대웅전 오른편에서 대웅전을 향해 서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촐한 맞배지붕집은 지장전이다. 명부의 10대왕이 모셔졌으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조각상들이다.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을 등지고 있는 건물은 응향각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선방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가정집 같이 낯익다. 대웅전 영역을 벗어나 대웅전보다 한 단 높여 쌓은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불조전 팔상전 원통전 장경각이 배치된 원통전 영역으로 들어선다.
불조전과 팔상전이 나란히 앞쪽에 자리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로 독특한 형태의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丁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도 특이하여 보가 없는 무량 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건물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꽃창호 아래쪽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 토끼 두 마리와 파랑새를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원통전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하여 숙종 24년(1698)호암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에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의 두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원통전의 뒤켠 오른쪽

으로는 응진전 달마전 진영당 미타전 산신각이 모여 있는 응진전 영역이 있다.
응진전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약간씩 밀려들어가면서 배열되어 있는데, 대문에서 볼 때는 가지런하게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그밖에 경내에는 창파당과 천불전 등의 전각이 있는데 대웅전 영역 왼편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증설된 건물들이다. 창파당은 종무소와 강원으로 상용되는 □자형 건물로, 현대적 건축재료를 많이 쓰고 외벽을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눈에 띈다.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대각암 가는 길의 해천당 옆에 자리잡은 뒷간이 그것이다. 입구에 '뒤 '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읽어 '깐뒤'로 애교스럽게 불리곤 한다. 예로부터 가풍(家風)을 알려면 화장실과 부엌을 보라고 했는데,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의 이 뒷간이야말로 단아한 선암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바닥의 짜임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 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아랫부분에 실창이 나있기 때문이다. 이 살창은 환기구 역할도 한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을 최근 새로 짓다시피 보수하였는데, 본래 '뒷 '의 장점을 잘 살린 채로 보수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히는 뒷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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