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사찰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이라는 명예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佛) 법(法) 승(僧) 가운데 승,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되었으니 세세손손 절의 자긍심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돈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국사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 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悠揚不迫)하게 짜놓은 동부(洞府),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長者)집 호정(戶庭)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가에서는 불ㆍ법ㆍ승을 불교 교단 형성의 세 가지 요소로 꼽는다. 이 가운데 한가지 비중이 크게 드러나 절의 특성을 이루기도 하는데,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그 영정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승보사찰, 통도사는 지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 해인사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불리며, 이들 세 사찰을 일러 삼보(三寶)사찰이라 한다. 절 아래쪽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다보면 내를 가로지르는 멋진 누다리를 만난다. 송광사의 길을 여는 청량각(淸凉閣)으로, 막상 걸어 지나갈 때는 눈길이 가지 않지만 개울 쪽에서 보면 무지개다리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잠시 앉아 다리쉼하며 송광사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청량각을 통과하면 계곡을 끼고 측백나무와 잡목숲이 나타나는데, 이 숲길은 시원스레 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지만 그다지 어둡거나 침침하지는 않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 좋은 길이다. 그렇게 숲길에 취해 걷다보면 일주문과 함께 송광사 역대 고승과 공덕주들의 비를 모아놓은 비림(碑林)이 나온다.
일주문은 기둥이 짧고 화려한 공포가 다소 버겁게 보이지만, 고색이 흐르는 단청과 일주문 양옆으로 낮게 질러놓은 담장에서 한결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일주문에서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조그맣게 서 있다. 우리 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에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모습에 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 경내로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우화각 안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읊은 옛 시인 묵객의 한시가 빽빽이 걸려 있다. 임경당은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자형 건물로, 건물 일부가 계류 쪽으로 돌출되어 계곡에 기둥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은 종무소로 쓰인다.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아래층 벽체에 환기를 위해 암기와 모양을 낸 꽃창에 드러난 명랑한 정서가 돋보인다.  천왕문을 지나면 먼저 종고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통과해야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약사전과 영산전은 대웅보전 앞마당 한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축물들이지만, 건축적인 가치가 있어 각각 보물 제302호, 제303호로 지정돼 있다. 약사전은 규모가 작은 단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로만 메워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는 영사전은 영조 13년(1737)에 중건되었으며, 약사전보다 크기만 좀 클 뿐 건물 생김새는 똑같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 당시 현재 지장전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증축하였다. 담 안쪽의 여러 건물들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대웅보전은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 건물로, 108평(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크기와 亞자형의 이색적인 건물 평면구조가 눈길을 끈다. 내부의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세 분과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닫집으로 꾸몄다. 대웅보전 외쪽 뒤편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집인 응향각이 있다. 응향각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관음전이다. 관음전은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었던 성수각(聖壽閣)이었다고 한다.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집으로, 중창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성보각(聖寶閣)은 유물 전시를 목적으로 지은 누각형 이층건물이다. 1997년 10월 개관했는데 목조삼존불감 등 송광사에 있는 국가지정 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들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송광사에는 우리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사격과 내력만큼이나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국사와 전각 그리고 보물이 많다고 하여 삼다(三多)사찰이라 하기도 했다. 성보각에는 국내 최대의 사찰박물관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송광사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광(木彫三尊佛龕, 제42호)그리고 고종제서(高宗制書, 제43호)이다. 높이 13.9m 폭 7cm되는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의 원불(願佛)이다. 이것은 지눌이 늘 지니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부처함으로, 닫으면 원통형이지만, 펼치면 가운데에 본존상, 좌우에 보현과 문수 보살이 각각 배치되는 구조이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모두 13점인데, 다음 다섯 책은 고려시대 목판대장경을 본보기로 삼아 조선시대 세조 때 다시 새겨 펴낸 목판본이다.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직접 감수한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보물 제206호), 「대승아비달마잡론소」(大乘阿毗達磨雜論疏, 보물 제205호),「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撰述, 보물 제206호),「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 , 보물 제207호)그리고 고려문서 2축(高麗文書 二軸, 보물 제572호)이 있는데,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와 노비첩이다.
이밖에 옛 승려들이 경권(經卷)을 말아둘 때 사용했던 정교한 죽공예품인 경질(經桎, 보물 제134호), 불경을 넣은 목함에 달아서 내용을 표시하는데 사용된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43개,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한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등이 있다. 최근에는 16국사 영정이 보물 제1043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앞서 살펴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이 있다. 그 외 능허교 및 우화각, 보조국사비, 자정국사 사리함, 능견난사

(能見難思), 금강저(金剛杵),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原佛),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등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송광사의 암자로는 천자암 감로암 불일암 인월암 오도암 등이 있는데, 송광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천자암의 뒤뜰에는 엿가락처럼 비비 꼬면서 자란 향나무가 있다.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중국 금나라의 왕자 담당이 꽂았던 지팡이가 땅에 각각 뿌리내린 것이라고 전하는 이 나무의 나이는 800살이라고 한다. 마치 스승과 제자가 절을 하고 있는 모습처럼 서 있는 향나무의 이름은 쌍향수로, 높이 약 12.5m이며,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비록 비공개 영역이 많은 송광사이긴 하지만 이렇게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면 육당의 말처럼 "둘러볼수록 큰 절, 옛 절, 갸륵한 절"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송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