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華嚴寺)

 

 화엄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며 신라사찰 가운데 지리산 입산 1호의 천년사찰이다. 한국의 삼보사찰이라 하면 불, 법, 승의 통도사(양산), 해인사(합천), 송광사(순천)를 각각 손꼽지만 여기에 교학(敎學)을 덧 붙인다면 아마도 화엄사가 으뜸일 것이다.

 절 구경을 가면 맨 처음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 당간지주와 일주문이다. 화엄사의 경우 특이하게도 일주문이 2개 있는데 매표소 근처의 신일주문은 그 모양이 마치 어느 왕릉의 관문같이 생긴 것이 우리나라의 절집들이면 예외 없이 겪는 '중창'의 흔적인 것 같다.  신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옛 일주문인 불이문이 나온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화엄사의 참맛이 풍겨나오는데 이 문은 크기는 작으나 보는 이를 압도하는 무게를 풍기고 있어 화엄사의 얼굴로서 손색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쳐 대웅전을 가리고 있는 보제루를 돌아가니 비로소 화엄사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인 구조는 보통의 절집처럼 대웅전 앞에 2기의 탑이 있고 좌우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으나 특이한 점은 대웅전보다도 높은 곳에 대웅전과 직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각황전(국보 제67호)의 존재이다. 각황전으로 인하여 화엄사는 보통 절이 아니고 '대찰'인 것이다. 실제로 대웅전 자체도 정면 5칸의 건물로 대찰의 중심 건물다운 규모를 갖추고 절 전체를 바라보고 있으나 각황전 앞에서는 그만 힘을 잃고 만다.

 각황전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다 오르니 눈앞에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석등 하나가 서 있다. 바로 국보 12호인 각황전 앞 석등으로서 그 높이가 6.36미터, 직경이 2.8미터에 이르는 대형이면서도 뛰어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이다. 이 석등은 서기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그 형태가 완전히 남아있는데 과연 통일신라의 석조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없이 나타내며 당당하게 서 있다. 이에 질세라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 형태로 장대하게 서있는 각황전은 민간 건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로서 외관상으로는 2층이나 내부는 천장까지 곧장 통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건물은 본디 장륙전이라 불리던 것인데 중창시 각황전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화엄사라는 절의 이름도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석경'을 이 각황전의 사방에 둘렀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장대한 각황전이 사방에 화엄석경까지 두르고 있었으니 얼마나 장대했을까. 비로소 각황전 앞 석등이 왜 그렇게 커야만 했는지가 이해가 간다. 아마 보통의 크기였다면 석등의 존재조차도 보이지 않았으리라.

 각황전 옆으로 108계단을 돌아 오르면 4사자석탑이라고 부르는 세존사리탑(국보 제35호)이 있다. 이 탑은 국어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어 화엄사의 유적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며 7∼9세기에 축조되어 초창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이 탑의 유래와 관련하여서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효성을 추앙하기 위해 공양탑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즉 석등의 공양인이 예배하는 연기조사이고 그 대상이 사자탑의 가운데 서있는 그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탑 자체와 석등을 합쳐 효대라고도 불리운다. 그 진위야 어떻든 탑의 상층부를 판석 대신 네 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고 그 가운데 여성으로 보이는 승려 입상이 서 있는 탑 자체의 모습도 특이하지만 배례석을 사이에 두고 공양하는 비구승이 들어 앉아 있는 석등의 존재로 인하여 이 탑은 뭔가 깊은 사연을 지니고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주위의 동백숲과 함께 화엄사를 지켜왔음이 느껴진다. 4사자석탑을 마지막으로 화엄사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한편에 화엄사의 부도(浮屠)밭이 펼쳐져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부도부터 최근의 부도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모습에서 이 유서깊은 절집의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보여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어느 정도 채워지는 화엄사 구경의 디저트로서 손색이 없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 첫번째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 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절집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며,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 지붕집이다. 천왕문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 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산문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동오층석탑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그러나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 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 국보 제 67호로 지정될 만큼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인데도, 더 당당한 위용을 갖춘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안정감이 있다. 각황전 앞에 서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노주(露柱)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세운 석조물인지 알 수 없다. 원통전 창방 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 산신, 동자, 나한상 같은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시기인 조선 중기 때 그린 것이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효대이다. 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사사자삼층석탑 주변의 동백숲과 반송은 화엄사 경치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치이다. 화엄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을 의식한 듯 곳곳에 새로 조성한 석등이 눈에 띤다. 화엄사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게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으며, 고려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있다. 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덕에 부도밭이 있다.


▷ 역사적 배경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우고 선덕여왕 11년(642) 지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7년 만에(인조 8년, 1630) 벽암 각성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 중수는 없었다.


▷ 가람배치

 전체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각 공간의 축이 약간씩 비껴선 병렬축의 형상을 띤다. 진입공간은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의 3문으로 이루어지는 선형공간이며, 보제루 앞마당이 부공간을 이루어 동선을 좌우로 배분한다. 주공간은 각황전과 대웅전으로 이루어지는 중정이며 두 중심건물이 직교축상에 있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서쪽 언덕위에 사사자삼층석탑이 있어 이 절의 승화 공간을 이룬다.

 가람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대웅전이지만 이 절은 건물의 규모와 성격으로 보아 각황전이 더 중요시된다. 이러한 주 공간 내의 모순을 해결키 위해 공간의 중심에서 볼 때 규모가 작은 대웅전을 가까이, 규모가 큰 각황전을 멀리 배치해 시각적 균제를 이루게 했다. 더욱이 이들과 중정 사이에 2단의 석축을 두어 다양한 체험과 시계의 변화를 유도해 동적균제를 이룬다. 회랑식의 평지 사찰이 중정식의 산지사찰로 전환되는 변화과정의 정수를 보이는 배치이다.



▷ 건축적 특징

 대웅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고, 외부의 기둥배치와는 다른 내부 평면계획을 하여, 불좌의 뒷기둥 열을 조금 후퇴시켜 예불공간을 확대시켰다. 양식적으로는 다포계 중기의 건물이라 볼 수 있으나 후기적 증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중기적 특징으로서는 내부 가구구조가 소박하고 공포대의 쇠서형이 간결한 점 등을 들 수 있으나, 첨차 끝이 구름모양 등 복잡한 형태를 취해 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각황전은 다포계 중기형식의 건물이며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중층형식의 건물로서 내부에 있는 15개의 고주가 기본 구조틀이 되어 여기에 1층부의 바깥기둥과 2층부의 변주가 부가된 구조방식이다. 2층벽은 창호로 처리해 천창(clearstory)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통층으로 된 내부에 조명을 연출한다. 정면은 중앙 3칸이 가장 넓고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입면을 구성했다. 측면은 5칸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깊이가 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불좌를 가운데 칸에 위치함으로써 뒷면 2칸을 열주랑처럼 분리해 버렸다. 이는 공간의 깊이보다는 불좌와 신도간의 접촉면을 더 중요시하는 불전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원통전은 정면과 측면이 3칸인 팔각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좌우협간에 문짝이 달려 있고, 그 위에 가느다란 토벽이 형성되었는데 벽화로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명부전은 정면5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신라화엄경사경'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8세기 중엽) 당시, 연기가 창건한 절이다.

연기는 당시 황룡사 소속 화엄학 승려.

억불정책을 취했던 조선시대에도 번창을 거듭한 화엄사. 인조8년(1630)에는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숙종28년(1702)에는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획득했다. 인조8년의 벽암 각성에 의한 중수, 숙종28년의 장륙전 중건이 계기가 되었다.

화엄사 경내는 4개로 구분, 영역화 되어 있다.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공간. 일직선인 듯하지만 약간씩 비껴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는 일주문. 금강문과의 사이에는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놓여 있다.

 화엄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각황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이다. 중심 법당이 대웅전임에도 불구하고 각황사의 그늘에 가려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각황전의 장대한 위용을 보았을 때, 이해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효대도 화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뛰어난 이형석탑으로 다보탑과 함께 꼽히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옆으로 넓게 퍼진 소나무들이 동백꽃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치가 일품이다. 각황전 뒤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