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樂安邑城)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 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써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그 동안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특히 6.25사변 이후 많은 훼손을 가져왔으나, 1983년 6월 14일 성과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이 국내 최초로 함께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이 되면서 1984년부터 3∼4년에 걸쳐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여장은 동문(낙풍루), 남문(쌍청루) 주변만 복원된 상태이고, 서문(낙추문) 옆 성곽에도 여장이 복원될 계획으로 있다.

2002년 10월 31일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한국의 전통적인 시골마을의 정취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마을을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으로 신청하기로 결정하고 낙안읍성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낙안읍성의 설화

 낙안읍성은 조선조 태조 6년 낙안 출신 의병장인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으로 쌓았다. 그 후 인조 4년(1626∼1628)임경업 군수가 낙안 군수로 재직하면서 지금의 석성으로 중수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임경업 군수가 하루밤 만에 쌓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임경업 군수께는 누나가 한 분 계셨는데 성곽을 쌓는 것을 누나가 돕기 위해 내기를 하였다. 임경업 군수가 성곽을 쌓는 동안에 누나는 병사들이 입을 옷을 만들기였는데 누가 떠 빨리 하는가 하는 내기였다고 한다. 누나는 봄에 목화를 심고 가꾸어 수확을 하여 당시 2.000 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고 임경업 군수는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곽을 쌓는데 누나가 옷을 다지어 놓고 나서 성곽을 보니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누나가 생각하기를 일개 아녀자가 일국의 장수를 이긴다는 것도 그렇고 특히 수많은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갈까 염려가 되는지라 다지어 놓은 군복 중에 한 벌의 옷고름을 짤라 놓고서 성곽이 다 쌓아 지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이 성곽을 모두 쌓은 후에 옷고름을 다시 달아 일부러 져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르는 병사들은 기뻐 환호하고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동생과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준 아름다운 누나의 모습 이야말로 전통적인 우리 여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