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寶林寺)

 

 보림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有治面)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조계종파의 절이다. 창건시기 860경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경내에는 국보 제44호인 3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東浮屠),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 ․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彰聖塔) 및 창성탑비 등이 있다.

 

  ▷ 보림사 동부도 (寶林寺東浮屠)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6m이다. 부도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墓塔)이다. 모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따랐으며,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 기단(基壇)을 두고 위에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깎여져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8각으로 매우 넓고, 그 위의 하대석(下臺石)은 반구형(半球形)이다. 3단으로 된 기단의 맨 아랫단과 맨 윗단에는 8잎의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각 귀퉁이마다 꽃 장식을 얹었으며, 가운데는 8각의 기둥을 낮게 두었다. 탑신 또한 8각 석주형(石柱形)이며, 우주(隅柱)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본떠서 그대로 새기고, 지붕돌은 다른 부분에 비해 좁고 낮은 편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중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위아래를 나누어 장식하였다.  탑신의 윗부분이 전체적으로 보아 높게 이루어졌으며 기단의 가운데 받침돌이 작고 낮아 안정감이 떨어진다. 잘 정돈된 구조가 돋보이며 머리장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의 조형수법은 세련되었으나 입체감이 부족하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나 고려 전기의 특징을 나타낸 묘탑으로, 부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보림사 서부도 (寶林寺西浮屠) 

 보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8각 원당형(圓堂形)으로 기본형태는 같으나 장식수법에 차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4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변형된 이색적인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 8엽(葉)이 놓였으며,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여의두(如意頭)무늬와 비슷하다. 중대석 또한 8각으로, 각 우각(隅角)의 연주형(聯珠形)으로 우주를 대신하고, 각면에는 원형 안에 4곡(曲)이 있는, 통식(通式)을 벗어난 안상(眼象)이 있다. 상대석에는 단판(單瓣) 8엽의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이 있고 판 안에는 타원형 윤곽 속에 4화형(四花形)이 첨가되었으며 윗면에는 탑신 받침 1단이 있다. 탑신도 8각으로 우각 표시가 없고 옥개석(屋蓋石)은 좁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매우 낮은 편구형(扁球形)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에 크고 작은 2개의 여의보주가 중첩되어 있다. 형태는 아름다우나 조식(彫飾) 수법이 섬약하고 장식성이 지나치다. 조형은 단정한 편이고, 특히 상륜부까지 모두 완형(完形)을 보존하는 귀중한 유품이라 할 수 있다. 원만한 비례와 규칙적인 결구(結構) 수법으로 보아 이 두 탑의 조성 연대는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이며, 고려 중기를 내려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3.46m, 비신 높이 2.64m, 너비 1.37m. 귀부(龜趺)와 이수(首)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김영(金穎)의 찬문(撰文)에 김원(金) ․김언경(金彦卿)의 서자(書字)로, 자경(字徑)은 2.4cm이다. 첫행부터 제7행의 ꡐ禪ꡑ자까지는 김원이 해서(楷書)로 썼으며,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行書)로 썼다. 내용은 보조선사에 관해서 전하며, 보조의 휘(諱)는 체징(體澄), 속성은 김, 804년(애장왕 5) 웅진(熊津: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조형은 신라 전성기의 것이지만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하였고 목은 직립하여 생경한 인상을 준다.

이수(首)도 정연하게 규격을 갖추었으나 세선각문(細線刻文) 등에서 형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부는 완존(完存)해 있으며, 다른 비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높고 큰 당대 비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묘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으로, 보조선사는 헌강왕이 내린 시호이며, 창성은 탑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리구(舍利具)를 절취당하면서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8각 원당형(圓堂形)을 따른 이 탑은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고, 지대석 윗면에는 얕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뒤에 팔각 석재가 2중으로 놓였는데 손상이 심하다. 탑신(塔身)도 8각이며 너비는 상대석(上臺石)과 거의 같다. 상륜(相輪)으로는 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조루(彫鏤)가 섬려(纖麗)하고 그 형태도 정돈된 편이다. 조성은 보조선사가 입적(入寂)한 880년의 4년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는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신라 헌안왕의 명으로 860년경에 건립된 대가람이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도 동서 양 3층석탑․석등․석불 등의 많은 유물이 남아 있고, 보조선사의 유적도 이 묘탑 이외에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가 남아 있다.


▷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寶林寺三層石塔-石燈)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석등.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남탑 높이 5.4m, 북탑 높이 5.9m, 석등 높이 3.12m이다. 남북으로 대립한 같은 규모와 구조의 석탑으로 그 사이에는 석등이 1좌(座) 있다.

 2중 기단(基壇)의 구성은 모두 통식(通式)을 따랐으나 갑석(甲石)이 얇아 평판적(平板的)인 느낌을 준다. 상하 기단 탱주(撑柱)의 수도 하층 기단에 2주(柱), 상층기단에 1주를 두어 간략화된 수법을 보인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1석(石)으로 하고 옥신에는 우주(隅柱)를 표시하였다. 1933년 도굴배가 사리장치를 훔칠 목적으로 탑을 파괴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다음해 가을 이를 복원하다가 초층 탑신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塔誌)를 발견하였다.

 명문(銘文)으로 보아 두 탑의 건립이 870년(경문왕 10)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각 부분의 비례가 알맞아 훌륭한 조화를 보이고, 조형 역시 화사하다. 석등의 제작연대도 두 탑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나 강건한 기백이 줄고 장식성이 가미되는 등 연대가 조금 뒤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1963년 2월 21일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l.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철제 불상이 유행하였으며, 이 좌상은 그 중에서도 대작으로 당시의 조법(彫法)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작이다.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한 뒤에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나발(螺髮)에 육계(肉  )는 크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볼은 살이 올라 통통하다.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다소 긴 코는 각이 져 우뚝하고, 두툼한 입과 커다란 귀 등에서 위엄이 느껴지나 전체적으로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전체 체구에 비해서 손은 지나치게 작은 반면 가부좌한 다리는 커서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통견의 법의는 V자형으로 앞가슴을 덮었으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반복적인 평행으로 비교적 유연하게 흐르고, 수인은 오른손으로 검지를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철을 이용해 불상을 만든 까닭은 9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면서 불상의 제작 또한 각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방의 호족들은 귀한 금을 이용하기보다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철을 불상 제작에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철제 불상이 등장하여 이전보다 양감이 떨어지는 불상이 제작되었다.

왼팔 후면에 양각된 명문(銘文)으로 보아 858년(헌안왕 2)에 무주장사(武州長沙: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金遂宗)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9세기 후반기 철불 유형을 이루는 새로운 양식의 선구적인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