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 부록 ◆



                                                                                                                                                                                                                          


square43_blue.gif  남도의 이모저모 ( 남도의 유명한 산 )



square43_red.gif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대하여



square43_blue.gif  석탑의 형태  



square43_red.gif  부도의 세부 명칭



square43_blue.gif  불상의 일반적인 형식


■  1. 무 등 산


* 위 치 : 광주시 북구, 동구, 화순군 이서면

* 높 이 : 1,187m


 광주에는 무등산이 있으며 무등산은 광주시민들의 숨결이며 마음씨다.

 무등산은 광주를 감싸안고 있고, 광주시민들은 무등산을 바라보며 지내며, 흔히 광주인의 기질은 무등과 닮았다고 한다. 무등산은 높고 낮음이 없고, 어디서 보나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고 푸짐하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사시사철 무등의 품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괴로울때나 즐거울 때나 무등에 기대어 살아왔다.

 무등산은 마한 백제시대에는 무돌. 무당. 무덤산이라 불렀고 통일신라 이후 무진악. 무악. 고려시대 때 서석산이라 불리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무등산이라고 하였다.

 무등산에서 사람의 발자취는 선사시대 에서부터 시작된다.

 충효동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은 이곳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백제시대에는 무등산에 성을 쌓았는데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수 있다고 즐거워 하면서 '무등산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무등산에는 여러 곳에 성터가 남아 있는데 충효동 성안마을도 돌을 인공으로 쌓았던 흔적 들이 남아 있어서 대대로 성이 존재하였던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영험있는 산이라 하여국제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광주시내 중심지역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이 둘러졌고 광주와 격리된 무등산은 쇠,도자기,종이등을 만드는 상공업자들의 생활무대가 됐다.

 그 유적으로는 금곡동의 야철지, 충효동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중앙관아에 납품되는 최고의 제품들이 만들어졌다.

 무등산은 전체적인 산세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무등산은 완만한 산세로 대부분이 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 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의 철쭉, 여름의 산목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등 변화가 많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호남정맥은 세 번 솟는다.

 다시 말해 시작인 장안산, 끝인 백운산, 그리고 한복판의 무등산에서 각각 1,000m가 넘는 용솟음을 한다.

 전체적으로 뫼 '山' 字를 연상케하는 호남정맥 흐름의 중심에 솟아 그 아래 골짜기마다 맑고 깊은 물을 품어 광주의 젖줄 노릇을 하는 무등산은 그 위치나 산세에서부터 으뜸으로 도 시를 품기에 부족함이 없는 산인 것이다.


♣ 주변볼거리


1) 증심사

 증심사는 무등산 서쪽 기슭의 등산로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9세기 말엽 철감 국사가 창건한 고찰로 고려 선종 11년에 혜선 국사가 고쳐짓고 조선 세종 25년(1443) 김숙이 삼건하였는데 이때 5백 나한의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합니다.

 그 후 병화로 불타버려 광해군 원년(1609)에 택경, 수장, 도광의 세 신사가 사창을 한 후로도 광주 고을 신도들의 성정으로 수 차례 보수를 하였다.

 그런데 6.25전난중인 1951년 4월 22일 5백전과 사성전만 남기고 대웅전을 비롯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고 그 뒤로 대웅전 중건에 착수하였으나 재정난등오로 착공 20년만인 1970년에 완공을 보았으며 그 밖의 건물은 1976년에 복원되었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불교도량이며 광주시내 인근에서는 큰 사찰로서 예로부터 그 법고(法鼓) 소리가 끊임없이 광주고을에 울려왔다.

 현재의 사찰 건물은 대웅전, 지장전, 비로전, 오백전, 적묵당, 행원당, 범종각 및 일주문 등이다.


 2) 장불재

 "문헌비고"에는 장불치, "동국여지승람"에는 장불동이라 적혀 있으나 이 고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장불재라고도 불렀다.

 장불재는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해발 900m의 고갯길이다.

 이 고개를 따라 곧장 산 아래로 내려가면 화순군 이서면이다. 옛날이서.동복 사람들이 광주에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던 지름길이었다.

 지금은 규봉과 입석대 서석대로 이어지는 등산로 구실을 하고 있는데 고개에서 동남쪽으로 뻗는 말잔등 같은 능선은 산악인들이 백마능선이란 애칭을 붙여주기도 한 초원이다.

 가을철에 이 능선 위에 피어난 억새꽃이 바람결에 하늘거리면 마치 백마의 말갈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 중머리재

 증심사에서 지정 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2km쯤 올라가면 대피소가 있다.

 그 대피소로부터 가파른 고개를 오르면 중머리재다. 이 중머리재는 해발 608m의 높은 곳이지만 정작 고개 위에 올라서면 발잔등처럼 아주 넓은 초원이 전개된다.

 이 곳은 바름목이 되어서 그런지 언덕에는 소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억새풀과 철쭉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중머리재는 흔히 중치라고도 하고 "유서석록"에서는 중령(中嶺)이라 했는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것을 스님의 머리에 비유하여 중머리재라 부르게 된 것 같다. 따라서 한자로 쓰자면 승두봉(僧頭峯)이다.

 5월 중순이면 철쭉꽃으로, 가을이면 억새꽃으로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여름철에 비지땀을 흘리며 이 고개마루에 오르면 확 트인 화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순식간에 땀이 개이곤 한다.


 4) 바람재

 증심사 입구에서 원효사쪽으로 가자면 무등산의 주 능선을 넘어야 하는데 그 고개가 바로 바람재다.

 이 중터리길은 겨울철에도 눈이 쌓이지 않을만큼 따뜻해 겨울철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길이다.

 전라남도는 지난 1983년에 덕산너덜을 가로질러석간수 샘터까지 2km 남짓 되는 등산로를 만들어 놓았다.

 

 5) 늦재

 원효사에서 바람재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고갯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늦재다.

 지금은 순환도로의 개설로 고갯길이 두동강으로 갈라졌으나 옛날 나무꾼들이 즐겨 다녔던 길이었다.

 육당은 '심춘순례'에서 열씩 스물씩 떼지어 방고를 울리고 구성진 노래가락을 부르면서 이곳에 올라오는 나무꾼들을 만났다고 적었었다.


 6) 꼬막재

 무등산장에서 규봉암을 향하여 의상봉의 뒤를 돌아 올라가면 꼬막처럼 둥글게 두드러진 고개에 이르는데 이곳이 꼬막재다.

 여기서부터 규봉까지 가파른 비탈길이 이어진다.  ·

 원래 부근에 꼬막같은 자갈이 무수히 깔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꼬막재 일대에는 풍치좋은 삼나무와 편백이 울창하다.


♣ 무등산의 경관

 무등산은 빛고을 광주 남동쪽에 높이 솟아 광주시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금남호남정맥이 장안산,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지나 분기된 후 명실상부한 호남정맥으로 전주 부근의 경각산을 거쳐 내장, 추월, 산성산을 지나 광주 남동쪽에 이르러 1186.8m의 웅장한 기세로 솟구친 산이 무등산이다. 정맥이 처음 시작할 어간의 장안산과 정맥의 종점인 백운산을 빼면 호남정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 무등산이다. 호남정맥이 요동치던 내장산군, 추월산군, 산성산군 일대에서는 800미터전후이던 고도가 88도로에서 130미터까지 낮아진 뒤에 다시 1200미터 가까이 치솟은 무등산은 멀리서 보면 주변의 산줄기가 낮아 독립산으로 보인다. 무등산은 그 골짜기에서 수많은 강줄기의 발원지가 되어 전남지역의 젖줄이 되는 산이기도 하다. 무등산의 서쪽 계곡으로 흘러 용추계곡을 이루고 광주쪽으로 꺾이는 물줄기는 광주천이다.

 

■  2. 월 출 산


 * 높이 : 808.7m

 *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강진군

 

 전라남도의 남단이며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는 것처럼 우뚝선 산 월출산은 서해에 인접해 있고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고 하여 월출산이라 한다. 정상인 천황봉을 비롯,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시루봉, 주지봉, 죽순봉 등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거대한 수석 전시장 같다. 정상에 오르면 동시에 3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지리산, 무등산, 조계산 등 남도의 산들이 대부분 완만한 흙산인데 비해 월출산은 숲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바위산에다 깎아지른 산세가 차라리 설악산과 비슷하다. 뾰족뾰족 성곽모양 바위능선, 원추형 또는 돔형으로 된 갖가지 바위나 바위표면이 둥그렇게 팬 나마 등은 설악산보다도 더 기이해 호남의 소금강이라 한다.


 바람폭포 옆의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는 지상 120 미터 높이에 건설된 길이 52m, 폭 0.6m의 한국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로 월출산의 명물이다. 사자봉 왼쪽 산 중턱 계곡에서는 폭포수가 무려 일곱차례나 연거푸 떨어지는 칠치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월출산은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풍경이 장관이고,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있는 운해,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월출산은 동백꽃과 기암괴석이 한창 절묘하게 어우러져 해빙기의 등산로로도 압권이다. 천황사에서 계곡에 이르는 1㎞ 남짓한 초입부부터 동백꽃으로 곱게 단장하고 있다.


 하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도갑사 부근에는 3월 중순 경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꽃이 3월말이나 4월초까지 절정을 이룬다. 월출산의 운해는 평야의 들바람과 영산강 강바람이 맞부딪쳐 천황봉 정상에서 만들어내는 구름바다가 볼만하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영암아리랑 노랫말이 말해주듯 월출산은 산봉우리와 달뜨는 광경의 어울림이 빼어난 산이다. 구름을 걸친 채 갑자기 우뚝 솟아 눈앞에 다가서는 천황봉의 신령스러운 모습, 그 위로 떠오른 보름달의 자태는 달맞이 산행의 명산이기도하다.


 월출산 일대인 영암, 강진, 해남은 "남도 문화유산답사의 1번지"로 꼽을 만큼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단아한 모습의 무위사, 서쪽에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도갑사가, 구정봉 아래 암벽에 조각한 높이 8.5m의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13호,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 50호다. 또한 도갑사 서쪽 성기동에는 백제의 학자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아스카문화의 원조가 된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돼 있다.




♣ 산행길잡이

 월출산은 악산이 아닌데도 산행코스가 상당히 험해 어린이를 동반하기는 무리이다. 철사다리가 유난히도 많고 바위와 돌, 그리고 계단도 많으며 계단간격이 높은 곳이 많다.

 월출산 산행기점은 천황사, 도갑사, 경포대, 무위사 등 모두 4곳이다.

대표적인 등산코스는 천황사를 기점으로 하여 천황사 - 천황봉- 미왕재- 도갑사 코스이다.

 월출산 동쪽 천황사에서 시작한다. 영암아리랑 노래비를 지나 바람폭포와 제일 높은 봉우리인 천황봉을 거쳐 구정봉(마애여래좌상), 향로봉, 미왕재를 지나 도갑사 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이 코스는 약 9㎞의 거리로 6시간쯤 걸린다.

 영암에서 월출산을 끼고 4㎞정도 남쪽으로 가면 천황사 입구에 도착한다. 천황사 주변은 붉은 동백꽃이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바람골로 불리는 계곡길을 따라 오르면 바람폭포에 이르고 그 옆에 월출산 명물인 구름다리가 보인다. 암봉에 걸쳐져 있는 다리를 지나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능선길을 오르면 자잘한 돌밭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다시 암봉 사이를 돌아가며 1시간 걸으면 통천문을 지나 월출산의 주봉 천황봉을 밟게 된다.

 정상에서는 장흥군 일대와 목포시, 아득히 두륜산과 무등산까지 보인다. 천황봉의 바위 절경을 즐긴 후 도갑사쪽으로 1시간 가면 바람재를 지나 9개의 바위 웅덩이가 있는 구정봉이다. 능선에는 연꽃송이, 사자, 뱀의 머리, 매의 부리, 죽순, 붓끝 같은 기암괴봉이 도처에 널려있다.

 구정봉에서 향로봉을 지나면 미왕재이다. 월출산 산행중 억새밭이라는 안내표시가 군데군데 있는데 이 억새밭이 미왕재를 말한다. 억새는 그리 볼 만하지는 않다. 여기서 서쪽 계곡길을 따라 도갑사를 향해 내려가면 또 다시 동백꽃들이 산사람을 맞는다.총산행 소요시간은 6시간이다.영암에 월출산 온천이 있어 산행후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월출산은 전국을 통틀어서도 걸출한 암봉이다. 하나의 산으로서 산밖에서 보기엔 월출산 만큼 아름다운 산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암에서 바라본 월출산은 힘을 주제로 한 정교한 조각작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경관미는 완벽하다. 넓은 들판 한쪽에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월출산의 힘을 느껴보려면 영암에서 강진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가도 옆에서 바라보라. 겹겹이 일어서는 암봉들은 천황봉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암봉들로 중첩되고 있어서 패턴으로서 삼각형을 수단으로 하여 산그림을 그려온 원로화가 유영국의 산그림을 상기시켜 준다.


♣ 월출산 정상

 이 산 노적봉 아래 상견성암에 있는 바위에는 "천 개의 바위봉우리는 서로 빼어남 견주고, 만 개의 구렁은 그 흐름을 다툰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월출산의 빼어난 경관은 일찍이 고산 윤선도를 비롯하여 서거정과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등 수많은 선비들이 시로 칭송하였다.

 

♣ 월출산 전경

 월출산 서쪽 기슭에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가 있고, 남쪽 자락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도선국사가 중건했으며 선간국사 형민이 삼건했다는 무위사가 있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당 사찰인 월남사터가 있는데 이 세 개 사찰에는 귀한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도 사계절 내내 물이 고여있다는 구정봉과 베틀 모양의 베틀굴, 남근석 등 눈길을 끄는 암석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거대한 암벽 가득 조각된 장중하고 인자한 마애여래좌상도 만나 볼 수 있다.

 하늘로 통하는 바위굴인 통천문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멀리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영산강 하구언이, 남쪽으로는 두륜산이 내려다 보이며 중첩선 산줄기 위 로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느즈막히 구림이나 주지봉쪽에서 굽어 내려보면 남해와 서해의 많은 섬과 강줄기, 그리고 서해를 진홍빛으로 물들이는 월출산만의 일몰 장관을 볼 수 있다

 

 





 

♤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대하여 


 무등산 한자락에 위치한 망월동 시립묘지의 제3묘역은 1980년 광주항쟁의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참배객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망월동'은 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의 자리라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묘역은 1980년 5월 18일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군사 집단에 항거하여 5월 27일 까지 광주를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하신 5월 영령과 암울했던 시대에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고문, 살해, 분신 등으로 민주제단에 바쳐진 열사들의 넋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그렇다면 먼저 왜이런 묘역이 생겨나게된 배경과 그 사건 그리고 그로인한 영향 등을 알아보자.


(1)발단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특히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야 말았다.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2)전개과정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해서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태우는 등(편파방송 때문)시위가 격해졌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진상을 전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21일에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이 날 오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했고,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하며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계엄 해제', '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했다.  이 자치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사태 수습을 둘러싸고 시민군 지도층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타협하자는 쪽과  정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구속인사석방,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결사 항전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통신*교통을 단절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21일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 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8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627명이 구속되었는데,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1981년 4월에 특별사면 및 감형으로 모두 풀려났다.


(3)영향


 신군부 세력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았다. 또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반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대학생들은 몇 차례에 걸쳐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1988년에 노태우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다.



♤ 불상의 일반적 형식


*불상의 전래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됨과 동시에 불상과 불경이 함께 들어왔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불상의 역사는 불교 수용의 역사와 일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언제부터 불상이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6세기 말 백제의 사신인 심신이 불상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한반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불상이 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불상은 1959년 뚝섬에서 출토된 것으로 5세기 초나 중엽 경의 중국 북위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대체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 우리나라의 불상 양식은 대체로 뚝섬의 불상처럼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의 구분


불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가 있지만 보통 존상의 위격에 따라 여래상(=불상), 보살상, 신중상, 나한 및 조사상으로 나뉘며, 여기서 다시 석가여래상, 아미타여래상 또는 문수보살, 관음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그리고 사천왕상, 팔부신장 등 매우 다양한 종류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결합이나 구조에 따라 삼존상, 불병존상, 독존상 등으로 나누기도 하며, 53불, 천불, 삼천불, 4방불, 5방불 같은 방위불 등의 구별도 가능하다. 또한 불상은 금, 은, 동, 돌, 흙 등의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지는데, 그 재료에 따라 금불상(金佛像), 은불상(銀佛像), 금동불상(金銅佛像), 철불상(鐵佛像), 나무불상(木佛), 돌불상(石佛像), 소조불상(塑造佛像), 도자불상(陶磁佛像), 협저상(挾紵像)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크기에 따라 장육상(丈六像), 반장육상(半丈六像), 등신상(等身像), 걸수반불상(傑手半佛像), 대불(大佛) 등이라 부르는데, 장육은 보통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16척 크기의 불상을 의미하며, 걸수반불이란 한뼘만한 길이의 불상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연가 7년명 금동불입상(539년 또는 599년 추정)은 중국 북조(北朝)의 북위양식을 보여주면서도 예리하고 투박한 조각수법이 잘 나타나있다. 반면에 백제는 남조(南朝) 특히 양(梁)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부여 군수리의 납석제불좌상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따뜻한 미소나 자연스러운 곡선에서 한국적인 인간미와 부드러운 조형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백제의 불상양식은 뒤늦게 발달하는 신라불상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7세기에 들어서는 수대(隋代)의 새로운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경주 배리삼체석불이나 삼화령 미륵삼존상과 같이 부드러움과 양감이 강조되는 불상양 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반가사유형보살상은 미륵신앙과 결합되어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였으며 국보 제78, 83호와 같은 금동반가상은 그 대표가 되는 걸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별로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의 각기 특징있는 불교미술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호오류지 (法隆寺)의 목조관음상이나 고오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같은 상에 그 영향이 나타난다.

● 신비성이 강함

● 중국모방으로 자주적인 성격은 약함

● 반가상이 많이 조성됨

  ←미륵신앙의 영향

  ←특수층이 자기 뜻대로 조상하려는 자력적 의미 강함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고 신라의 불교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상조각도 신체비례에 균형이 잡히고 얼굴의 세부 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장식 등의 표현에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유물들은 대부분 경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8세기의 감산사지 출토 석조아미타불 및 미륵보살입상이나 석굴암 불상군 등에서는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발달한 불상양식의 신라적인 수용과 변형에 따른 한국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석굴암 불상군에 나타난 종교적인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뛰어난 예술성의 극치이며 균형과 조화를 이룬 석굴 속에는 불, 보살, 천인, 나한들이 모여서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루고 있다. 신라 후기에는 금동불이 적어지고 조각수법이 쇠퇴하는 대신 석굴암의 본존을 따르는 항마촉지인 불좌상 형식과 지권인(智卷印)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새로이 등장하여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까지 유행하였다.

● 이상세계를 향한 깊은 사색을 통한 사실적 조화미의 극치를 보임-불상에

   대한 귀의의 감정과 자력적 불심이 조화를 이룸

   (자력적 의미와 타력적 의미의 조화)

● 반가상 대신 비로사나불상과 아미타불이 많이 조성됨


*고려


고려시대에는 불상의 중심지도 경주를 벗어나 지방 여러 곳에서 선종사찰이 세워짐과 동시에 지방호족들의 후원으로 불교미술도 지역적으로 발달하였다. 즉,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불상형식이 나타나며 연산 개태사 삼존불상이나 논산 관촉사 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보살입상 등 충청도 지역에서도 개성적이고 규모가 큰 대형불상들이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도 역시 중국 오대(五代), 요(遼), 송대의 불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 나름대로의 지역성과 토착적인 조형미를 살려서 인간적인 부처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청도 문수사, 장곡사의 금동불좌상과 같이 온화하고 정돈된 조형감을 보여주는 불상이 만들어지는 한편, 원나라 왕실과의 교류로 인하여 라마불상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이고 새로운 불상형식이 일시적으로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 신라불상에 비하여 수준이 떨어짐

  ← 불상이 귀의 감정으로서의 대상임

  ← 선종의 파격적 시도

● 자력+타력의 조화를 못이루고 자력(선종) 또는 타력(불상)한 의미만의

   종교로 변화

  ← 대중불교, 의식불교로서 각종 불교의식이 성행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 의 정책과 함께 국가적인 후원이 줄어들어 불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고려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차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로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해 소규모의 불상 제작과 개인용의 불감(佛龕), 목각탱 등이 만들어졌다.

● 예술적인 아름다움 창조적 양식이 사라지고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불상이 조각됨

  ←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사회적인 의미를 잃음

  ← 세속화되고 형식화 됨



부처님의 존상을 보고 일견하여 어느 부처님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절을 순례하여야 생기는 것이나 차후에 그러한 능력을 가지기 위하여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존상의 실제 모양에 의하여 구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머리에 쓰는 보관과 그 깨달은 진리를 상징하는 손의 모양(수인 : 手印 또는 인상 : 印相) 그리고 소지한 물건의 종류에 따라 각 존상의 특징이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비로자나불 : 삼신불(三身佛)이라하여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라는 용어가 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이기 때문 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서 손의 모양은 그림과 같이 두 주 먹을 오른손이 위로 가도록 아래위로 포개고 밑의 왼손 검지를 위의 오른손 주먹으로 감싼 지권인의 모습이다.

또는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 전체로 감싼 모습도 많이 보인다. 삼존불을 모시는 경우에 좌우의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불을 모시는데 두 부처님이 모두 보관을 쓴 보살의 모습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2)석가모니불 : 입상일 경우에는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하고 계신데 그림과 같이 시무외인은 손바닥 이 앞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펴서 어깨까지 올린 모양이며, 여원인은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여 손 전체를 밑으로 늘어뜨린 수인이다.

이 시무외인은 중생의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수인이며 여원인을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수인이다.

그리고 좌상(坐像)일 경우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한 것이 통례이다. 항마촉지인은 그림과 같으며 좌상의 모 양은 결가부좌한 좌석의 자세에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을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협시하는 보살은 기본적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따라서 삼존을 모시는 경우에 왼쪽에 문수 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변형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 살을 협시보살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3)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대개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이 미타정인의 손모양은 좌선 자세에서 양손의 검지를 꼬부려 손가락 끝을 엄지손가락 끝에 붙이되 검지손가락 등이 서로 맞닿도록 하는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비롯 하여 아래의 그림과 같이 아홉가지의 모양이 있다.

이것은 구품(九品)이라 하여 극락정포에 왕생하는 아홉 가지의 차별을 의미하는데, 상품·중품·하품을 각각 상·중·하로 세 분한 아홉가지이다.

협시하는 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제지보살이므로 미타삼존을 모시는 경우에는 왼쪽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4)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은 다른 불상과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계시기 때문에 쉽게 식별할 수가 있다. 입상과 좌상이 동일한 양식이며 협시 보살로 왼쪽에 일광보살, 오른쪽에 월광보살을 모신다.


(5)미륵존여래불 :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이 사바세계에 내려오시어 중생을 제도할 미래의 부처님으로서 보살상으로도 모시어 미륵보살이라고 하며 보통 탑으로 된 보관을 쓰시거나 손에 탑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모신다.



                                square05_purple.gif 석탑의 형태 와 부도의 세부 명칭 square05_yellow.gif


석탑의 형태

부도의 세부 명칭